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일에 집중할 뿐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시구로가 한 달 만에 명저를 쓴 비결이
온갖 잡일과 집안일을 대신해준 아내 덕분이라는 인터뷰 기사를 보고 속된 말로 '빡쳤다'.
http://www.hankookilbo.com/v/3c0a1bd6cdef4c0d8372202b8102a732
기사를 보고 순간 욱해서 페북에 분노의 넋두리를 쏟아냈다.
누가 요새 나를 작가님이라고 부르면 쪽팔릴 정도로
나는 육아와 가사에 시달리는 전업주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나도 이시구로처럼 누군가 내가 하는 집안일과 육아를 전담해준다면
한 달안에 최소한 단편 하나는 완성할 자신 있다고 말이다.
이시구로와 감히 비할 바도 못되지만 나도 나름의 창작욕을 지닌 작가로서
나의 정체성(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젖먹이 아기 키우느라 집에서 꼼짝도 못 하는 주부일 뿐.
아기가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과 별개로 육아는 역시 힘들다.
애들 재워놓고 책 좀 읽어야지 하고 생각해도 쌓여있는 설거지 더미, 방바닥에 어질러진 머리카락과 먼지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어쩌다 애들 재우고 밤늦도록 뭐 좀 끼적거리다 자면 다음날 체력이 안 따라줘서 비실비실. 그렇게 매일 주부로, 엄마로 90%의 일상을 살면서도 10%는 작가로 살기 위해 아등바등거리던 찰나에
저 기사는 내 잠재된 분노에 불씨를 제대로 댕겨버렸다.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속상한 마음, 분노, 체념 등등...
내면에 뒤엉킨 감정의 찌꺼기는 조그만 출렁거림에도 회오리를 만들며 나를 꽤 오랫동안 괴롭혔다.
그러다가 우연히 육아 멘토 서천석 선생님의 페북 글을 접하고
비로소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아이와 더 행복해질 방법은 무엇일까? 나의 관찰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아이와 함께 하는 사람'으로 둘 때 육아에서 행복하기 쉽다. 아이와의 시간, 아이와의 활동, 아이와의 관계를 자기 삶의 중심에 놓는 사람이 육아를 수월하게 한다. 행복도 많이 느낀다. 이왕 비를 맞을 상황이니 아예 온몸을 비에 푹 적시고 즐기는 식이다. (물론 아이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다면 전혀 다른 얘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아이를 키우고 아이와 함께 사는 사람'으로 잡는 부모를 요즘에는 찾기 어렵다. 거기에서 육아의 어려움이 온다. 요즘의 부모에게 육아는 부담스럽고 잘 해야만 하는 과업일 뿐 삶 그 자체가 아니다. 삶은 그저 살아가면 되지만, 해야 할 과제는 부담이기 마련이다. 요즘의 부모들에겐 육아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스스로의 정체성도 육아나 가족보다는 다른 쪽에서 찾곤 한다.
오늘 VOS의 보컬이던 가수 박지헌 씨와 잠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5남매를 키우고 있으며 아내의 뱃속엔 여섯 째가 될 딸이 자라고 있다. 아이를 카우는 일부터 살림까지 부부가 함께 하는 그는 홈스쿨링까지 하고 있다. 그래도 그는 늘 이야기한다. 그다지 힘들지 않다고. 사람들은 힘들지 않다니, 그게 말이 되냐고 묻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안다. 육아는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사랑으로 뭉친 가족을 이끄는 아빠'에 두고 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아이를 사랑하고 함께 하는 부모라 말할 수 있다면 아무리 힘든 육아의 과정이라도 한결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다.
반면 자신의 정체성과 육아의 거리가 멀수록 육아는 부담스럽다. 아이는 기본적으로 부모가 주는 만큼 돌려주지 않는다. 그러니 육아는 기본적으로 손해다. 거기에 의미도 제대로 부여하기 어렵다면 육아는 발목을 잡는 방해물이 되기 쉽다. 그런 딜레마는 현대 사회에서 불가피하다. 가정이, 또 가족이 더 이상 한 개인의 삶에서 중심이 아니기에. 요즘의 부모들이 힘들어하는 중요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
서천석 선생님의 글을 읽고 그동안 내가 힘들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둘째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온 우주를 채우고 있는 암흑물질의 정체는 바로 사랑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아이에게 충실한 엄마였다. 그때는 그도 그럴 것이 애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그 어린것을 24시간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 데다 나 역시 그런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였기에 마음의 저항(?)이랄 게 없었다.
하지만 산후조리가 끝나고 좀 살만해지니 슬슬 다시 작가로 살고 싶어 졌고
아기 낳기 전부터 하기로 약속한 작품 활동을 위해 불과 50일이 지난 어린것을 이웃집 할머니에게 맡겨두고
아이디어 회의하러 왕복 2시간이 넘는 거리를 왔다 갔다 했다. 회의가 끝날 때쯤엔 젖이 불어서 딱딱해진 가슴을 부여잡고 서둘러 도망치듯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지길 반복하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했다.
하지만 그렇게 두 달 여동안 지속된 작품 구상회의는 다른 이유로 스톱되었고
가슴속에 미련만 품은 채로 나는 다시 육아맘으로 돌아왔다.
사실 돌도 안 된 젖먹이 아기를 두고 일과 육아를 병행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한편으론 일이 엎어진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는 현실 속에 매일 티도 안 나는 집안일과 육아를 반복하면서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던 거다.
내 정체성을 결코 주부나 엄마에 두고 싶지 않다는 그 완강한 내면의 저항.
책 한 권 제대로 못 읽을지언정 계속 나는 작가로 살고 싶다는 그 욕망.
그것이 나를 가장 힘들게 했었다.
하지만 서천석 선생님의 글을 읽고 나서 나는 나름대로 정리를 했다.
내 아이는 아직 많이 어리다. 내 인생도 중요하지만 아이의 인생도 중요하다.
그 녀석의 인생에서 지금은 가장 엄마가 필요한 시기이니 나의 욕심을 잠시 접어두자고.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아이를 건강하게 잘 키우는 일이니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그 일이 내가 작가로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늦출지라도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 않은가?
또한 나의 인생도 길다.
긴 인생에서 지금은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목매달게 아니라, 주부와 엄마로서의 정체성에 집중할 시기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그렇게 견디자고. 아니 즐기자고.
그러면서도 불숙 불쑥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되찾고 싶어 지는 순간엔
오늘처럼 틈나는 대로 늦은 밤까지 글을 끼적거려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