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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Apr 08. 2024

프랑스어 공부로 극복한 가면증후군

취미예찬: 취미가 중요한 이유를 서른다섯에 깨닫다

나는 어떤 면에서 오랫동안 피해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직업들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내가 선택한 직업들은 과연, 내가 선택한 것인가 혹은 부모님이 가지고 있는 기대치 내에서 안전한 직업들 중 나에게 가장 맞는 것을 선택한 것일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여러 직업들을 바라본다.


내가 정육점에서 일한다면 어땠을까? 나는 여자치곤 꽤나 악력과 힘이 좋은데.

내가 제과점을 운영하는 파티셰였다면 어땠을까? 나는 빵 굽는 냄새가 너무 좋은데.

내가 헤어 디자이너였다면 어땠을까? 누군가에게 맞춰서 맞춤 디자인을 하고 자기만의 기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게 멋있어.


하지만 내가 선택한 직업은 달랐다.

외국어를 좋아한다면 한 번쯤 생각해 보는 직업인, 세상 사람들은 '동시통역사'라고 부르는 국제회의 통역사.

유럽에서 국제분쟁해결을 전공하고 유엔에서 일하는 미국 변호사.


제법 그럴듯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 제법 그럴듯한 자존감이 따라올 줄 알았다.


자존감이 뭘까.  스스로 자(自), 존경할 존(尊), 느낄 감(感)

스스로를 존경한다는 느낌.


나는 오랜 기간 직업적 정체성에 대한 자존감이 결핍되어 있었다. 내가 한 선택이 옳았다는 걸 스스로에게 늘 증명하려고 했고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찾고자 했다. 학위를 여섯 개나 땄어요? 공부를 되게 좋아하나 보죠? 주변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손사래를 쳤다. 나는 공부가 너무 힘들어서, 집중력도 강할 땐 강해도 평소엔 너무 약해서, 공부로 1등을 해본 적도 없고 그렇게 머리가 비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어서, 내가 공부를 좋아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도서관 가는 것도 너무 싫었다. 가본 적은 있지만 오히려 앉아있을 땐 딴생각하고 핸드폰 가지고 논 기억 밖에 없다. 그런 내가 싫었고, 이 직업에 확신을 가지고 집중을 잘하는,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런 내 모습을 본 나의 결론은, “아, 나는 해야 하니까 한 거였어”였고 인내심 정도는 좋은 편이 아닐까 생각했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버티는 것. 그게 내 장점이라 여기까지 온 거라고.


그런 나의 생각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했다. 내가 선택해서 내가 갖고 있는 직업이 과연 나에게 맞는 직업인지도 고민했다. 분명한 동기가 있어서 선택한 직업이었건만, 어떨 땐 그럭저럭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막상 그 직업의 본질인 공부가 과연 나에게 맞는 건가. 나는 어쩌면 나를 위한 온전한 선택이 아닌 안전한 선택을 한 건 아니었을까. 그런 내 생각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하는 기간 내내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더 이상 학위를 위한 공부를 하지 않는 현재에도 나를 설명하는 직업적 타이틀에서 읽히는 이미지와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알고 있는 나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괴리가 나를 계속 괴롭히고 가면 증후군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어는 어쩌다 보니 시작하게 된 공부였다. 그전에는 알파벳인 아베쎄 정도 하고 문법도 동사에 유형이 있다는 걸 맛만 본 후 완전히 내려두고 작년 10월 정도에 다시 파트타임으로 시작했다. 국제법을 하는 입장에선 물론 유용하고, 프랑스어를 쓰는 스위스 제네바 지역에서는 더욱 유용한 언어이긴 하지만 굳이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심지어 내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넘어갈지도 모르는 이 시점에서, 더더욱 프랑스어를 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내 반려자가 프랑스인이기 때문에, 그와 가족들을 잘 이해하고 우리 가정에서 태어날 아이가 한국과 프랑스의 언어와 문화를 둘 다 잘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고 매일마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사실 일이 힘들었던 시기라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지 않았고, 꽁쥬가씨옹(conjugation)이라고 불리는 동사변화도 잘 외우질 못해서 선생님께 가볍게 한소리를 들었다. 이러시면 안 된다고. 일주일에 한 번씩 한국인 튜터 선생님과 온라인으로 만나서 하는 수업에서 수업은 안하고 한국 얘기와 프랑스 얘기를 하거나 너무 인생이 힘들어서 하소연을 한 적도 꽤나 있었다. (착한 우리 선생님은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싶어 진도 빼야하는데 하시면서도 들어주고 계셨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프랑스어 유창성 능력 테스트인 델프(DELF)에서 A2 레벨 시험을 신청했다. 듣기, 말하기, 독해, 작문을 모두 테스트한다.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친 시험인 것 같다. (기사 참조: A2는 친숙하고 일상적인 주제로 간단하고 일상적인 업무 수행에 필요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초급 수준이다. 간단하게 자신의 학력과 주변 환경을 기술할 수 있으며 필요한 내용을 바로 말할 수 있는 단계다.)


그냥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동기부여에 의미를 두고 쳤던 시험인데, 인터뷰를 망치는 바람에 말하기 영역은 말아먹었지만 어쨌든 나머지 영역은 높은 점수로 합격 :)



물론 초급레벨의 시험이지만, 그 어떤 취미보다 프랑스어 공부와 이 결과가 나에게 시사했던 바는 정말 컸다. 꼭 필요한 공부도 아니고, 그 사이에 일이 많아 힘들었고 개인사도 많았으니 그만 둘 이유는 너무 많았는데. 나는 배우는 걸 진심으로 좋아하고, 끈기롭게 하는 사람이구나 라는 걸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 알았다. 영어는 내가 좋아하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 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연히 하게 되는 거고 도움이 되니까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정말 스스로 즐기고 있구나, 라는 걸 많이 느꼈다. 무엇보다 프랑스어를 알게 되고 프랑스인 가족이 생기며 알게 된 프랑스 문화가 나는 너무 좋아졌다. 한국인으로 살며 형식을 갖추는 것에 이골이 난 나에게, 교양 있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위한 고풍스러운 형식은 지키되, 예의바름을 앞세운 가식은 일절 없는 프랑스 문화의 솔직함은 충격적일 정도로 신선했다. 미국에서 지낼 때는 층층이 쌓여있는 pol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문화와 인종을 중심으로 분리된 (segmented) 문화에 피로감을 느끼며 다양성은 있되 존중은 없는 미국에 실망했는데 세상에 없는 줄로만 알았던 진정한 의미의 존중을 나는 프랑스인에게서 느꼈다. 나는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만큼은 나로 행동하는 게 편안하다. 그래서 좀 더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다. 나는 ‘필요하니까’ 공부하는, 목적성의 공부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순수한 의미에서의 지적 호기심이 큰 사람이구나, 그리고 좋아하기 시작하면 깊이 있게 알고 싶어 하고, 이렇게나 앎에서 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느꼈다.


그러니 평생 공부해야 하는 변호사라는 직업은 결국 나에게 맞는 선택이었다. 취미가 삶과 일 사이의 균형을 찾기 위해 중요하다는 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된 행위에서 느끼는 기쁨과 성취감이 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이렇게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줄은 나이를 서른다섯 먹을 때까지 몰랐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 부모님께서 내 어릴 적 작은 취미들을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다면, 사회가 취미를 '자기 계발'의 일종이 아니라 스스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길임을 알려주었다면 나는 좀 더 빨리 취미가 어떤 의미 인지를 알고 순수한 기쁨을 탐색하고 즐기며 몰입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올해 안에는 B1을 따서 미국으로 가기 전에 프랑스어의 토대를 어느 정도 완성해두고 싶다. B2가 프랑스에서 대학교를 입학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하니, 좀 더 힘낼 수 있다면 B2도 올해 안에는 도전해보고 싶다. 앎의 순수한 기쁨을 위해. 유아기로 돌아간 듯 때묻지 않은 나의 행위에 온전히 집중해보고, 알고, 다시 뜯어보고, 음미하며 목적과 생산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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