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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May 26. 2024

기후 어벤져스에게 기부를

강원도교육청 블로그 나눗쌤 5월

학급 운영비가 1억 쯤 된다면 우리 반 아이들과 독일 보봉 마을로 현장체험학습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벌써 몇 년 전이지만 아직도 보봉 마을 수업이 잊히지 않는다. 4학년 국어 교과서에 보봉 생태마을이 나온다.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지방에 있는 보봉 마을은 태양열 에너지를 주 에너지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원래는 1992년까지 군대 주둔지였다. 날씨가 끝내주는 지역임에도 군부대 도시이다 보니 다소 삭막하고 칙칙한 이미지를 풍겼다. 그러나 철군 이후 주민들이 합심하여 생태마을을 꾸려나가게 된다. 치열한 토론과 합의를 거치며. 


특이하게도 보봉 마을에는 개인 주차장이 없다. 한국이라면 응당 주차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정원과 공원, 놀이터, 자전거 주차장이 들어서 있다. 외부인이 보봉 마을로 이주하고자 한다면 개인 주차장을 짓지 않겠다고 서약서를 써야 한다. 굳이 자동차를 운행하고 싶다면 마을 공용 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주차료는 차 한 대 당 3700유로, 한화로 500만 원이 조금 넘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주민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카풀 팀을 적극적으로 만든다.  


나는 유튜브에서 보봉 마을을 다룬 여행 영상을 아이들과 같이 봤다. 글과 영상은 서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이야기가 달랐다. 가령 영상 속에서는 보봉 마을 주민들의 표정이 생생히 읽혔다. 마을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어린이다. 이웃을 경계하거나 탈 것에 부딪힐까 긴장하는 기색이 없다. 자전거와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모들도 무척 느긋하다.  


자동차가 사람보다 더 대접을 받는 한국에서는 언제나 "차 조심해라!", "사고 난다. 좌우 살펴라!"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자동차가 사라진 공간에서 보봉 마을의 아이들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넓은 공터에서 마음껏 뛰고 걷고 장난을 쳤다.  


학생 눈에는 보봉이 탄소 제로 마을이라는 점보다 활짝 웃고 있는 독일 또래의 모습이 더 좋았나 보다. 당시 우리 학교는 교통 상황이 나빴다. 스쿨존에서 조차 횡단보도를 무법천지로 침범하는 차가 흔했다. 키가 작은 아이가 시야의 한계로 갈팡질팡하면 화를 내는 어른도 다수. 노키즌 존에 열광하는 무섭고 삭막한 어른을 보다가 아이를 최우선으로 배려해 주는 보봉 주민에게 한국 어린이가 홀딱 반하는 것은 당연지사.  


"선생님 보봉 마을에 여행 가고 싶어요."

"그러게. 내가 독일 총리였으면 너희 모두 보봉 마을에 초대할 텐데." 


우리는 부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저 웃기만 했다. 보봉 마을은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한다. 에너지 효율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단열재를 꼼꼼하게 사용한 집, 거대하게 자란 숲의 나무, 집집마다 지붕에 설치된 태양열 전지판, 자전거를 안전하게 타고 다닐 수 있는 거리. 우리 반 꼬마들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도시를 원했다.  


태양열 전지판이 지붕에 설치된 보봉 시내 모습 ⓒKBS다큐 유튜브 화면 갈무리


환경 주제로 수업을 시작하면 아이들이 귀를 쫑긋 세운다. 어린이는 지구에서 살아가야 할 날이 어른보다 길다. 태어나 보니 망가져 있는 지구 앞에서 아이들은 억울할 법도 하다. 10대였던 그레타 툰베리가 등교 거부에 나섰을 때 전 세계의 청소년이 반응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지구는 안심하고 살아가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그럼 우리는 지구를 지켜내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거의 두 시간을 할애하여 반 아이들과 토론했다. 아이들은 나름 열심히 의견을 말해주었다. 에어컨을 꺼야 해요, 텀블러를 들고 다녀야 해요, 물을 적게 써야 해요, 자동차 대신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녀요.  


유치원 무렵부터 환경 수업을 반복적으로 받아온 세대답게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여러 실천법을 두루 알고 있었다. 이미 집에서 성실하게 노력하는 경우도 꽤 여럿이었고. 나는 아이들에게 선생님도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들려주고 싶었다. 우리의 개인적인 실천도 좋지만 어른으로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내와 내가 고안해 낸 방법이 '기부'였다. 우리도 가정과 학교에서 친환경 실천을 게을리하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아쉬움이 들었다. 가령 화장품 용기 분리수거 같은 일이 그렇다. 화장품 용기는 재활용이 어려운 제품이 많다. 우리가 힘들게 끈적끈적한 화장품 라벨을 떼내고 통을 깨끗이 씻어 말려도 재활용되지 못하고 매장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화가 나고 몸에서 기운이 쑥 빠졌다. 근본적으로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시민의 노고가 무의미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상에는 법과 제도를 뜯어고치기 위해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바로 환경단체와 활동가 분들이다. 개인의 안녕과 경제적 이익이 중시되는 시대에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감사한 일이다. 실존하는 어벤저스라고나 할까.  


우리 부부는 정기 후원과 일시 후원을 모두 한다. 환경연합과 그린피스에는 월마다 정기 후원을 하고 일시 후원은 틈틈이 여러 단체에 나누어한다. 비록 소액이지만 기후위기라는 명명백백한 위기 상황에서 싸워주는 사람을 응원하고 싶었다.  


아내와 나는 <지구를 구하는 가계부>라는 책을 내면서 약속을 하나 했다. 저자 인세의 10%를 '와이퍼스'라는 플로깅 봉사 단체에 기부하겠다고. 아직 정산 시기가 도래하지 않아 초판본 인세를 받지 못했지만 받은 셈 치고, 1쇄를 모두 판매한 금액 기준으로 10%를 계산하여 먼저 기부를 했다. 


와이퍼스에 후원하면 대표님이 직접 한 명씩 편지도 보내주신다.


우리는 결코 고액기부자가 아니다. 어디 가서 크게 떠벌릴 처지도 아니고 경력도 없다. 다만 교육 목적으로 기부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는 싶다. 우리나라는 기부 문화가 약한 편이다. 기부를 한다고 하면 그 돈이 제대로 쓰이지 않을 거라며 만류하는 사람도 있다. 혹은 기부 사실 자체를 알리지 않아야 한다고 점잖게 타이르는 분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나는 어차피 대단한 후원가처럼 상당한 자산도 없고 기부 금액도 적다. 숨기고 말고 할 액수가 아니다. 그저 보통의 시민으로서 기부 문화 형성을 위해 홍보를 하자는 입장이다. 기부에 대한 불신의 이미지를 없애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야 뜻있는 분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기에. 


독일의 보봉 마을이 생태마을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공동체가 있었다. 탄소배출제로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이익을 포기해야 하고, 서로 양보해야 할 영역도 생긴다. 제도와 마을 규칙 등 건드리기에 매우 복잡한 사안을 조율하는 역할도 필요하다. 


생업에 종사하는 개인이 이 모든 지난한 과업을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직업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앞장서 주시는 분들이 있다. 우리도 그분들을 뒤에서 도우면 좋지 않을까.

보봉 마을을 부러워만 하기에는 기후 위기는 코앞에 닥친 현실이다. 되돌릴 수 없는 거대한 재앙의 세계에서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나보다 더 강력한 사람의 등을 손바닥으로 밀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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