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아침독서> 2024 10월호 함께 읽어요, 책 '눈과 보이지 않는'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 시외버스를 타고 고향을 떠나올 때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되는 기분을 느꼈다. 머리로는 고향 밖에도 다른 도시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실천은 다른 문제였다. 직접 터미널에 가서, 돈을 내고, 티켓을 받아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근사한 도전. 나는 <눈과 보이지 않는>을 읽으며 두근거림과 떨림이 교차하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경험을 했다.
책 속 주인공은 근사한 개다. 정확히는 코요테와 개의 피가 반씩 섞인 무지하게 빠른 ‘요하네스’다. 넓은 공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요하네스는 누구보다도 날쌔고 강인하다. 도시에서 인간이 주는 먹이로 연명하는 반려견과 달리 나무 굴에서 잠자며, 식량도 직접 구해 먹는다. 요하네스는 공원 구석구석을 꿰고 있다. 멍청한 오리들이 머무는 연 어딘지, 동물 방역 인간이 출몰하는 시간대는 언제인지 훤하게 안다.
공원에서 정신적 지주로 대접받는 동물이 있다. 바로 울타리 안에서 아주 오랫동안 지내온 들소 세 마리다. 요하네스가 이 세상에 오기 전부터 공원에서 살아 온 들소들은 나이가 많고 현명하다. 이 땅의 역사를 이해하고 있으며 인간과 동물의 미묘한 균형을 잘 맞춘다. 빛처럼 발이 빠른 요하네스는 들소의 '눈'으로 활약한다.
요하네스에게는 자신을 도와 공원의 대소사를 함께 해결하는 '도우미 눈' 친구들이 있다. 갈매기 버트런드와 팰리컨 욜란다, 다람쥐 소냐, 너구리 앵거스는 언제나 요하네스를 응원하며 돕는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에 못 보던 동물이 대거 등장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머리를 땅에 박고 열심히 풀만 뜯어먹는 염소들이 배를 타고 온 것이다. 그중 우아하고 친절한 염소인 '헬렌'은 요하네스에게 충격적인 진실을 들려준다. 본인들은 거대한 산과 초원이 펼쳐진 메인랜드에서 왔고 여긴 섬에 딸린 작은 공원일 뿐이라고.
쿠궁! 요하네스의 머릿속에서는 번개가 친다. 모래사장 너머 바다가 무진장 넓어 보인다고만 생각했지 또 다른 우주가 펼쳐져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요하네스는 들소를 섬에서 탈출시키는 계획을 세운다. 자신은 '눈'으로 활동하며 공원의 요모조모를 살피며 다녔다. 갈매기 친구 '버트런드'만 해도 하늘을 날아다니며 온갖 묘기를 즐겼다. 반면 들소는 울타리 내에서만 뱅글뱅글 돌아다니다 생을 마감해야 했다. 지혜로운 들소는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었다.
요하네스와 친구들은 카이사르도 울고 갈 천재적인 작전을 펼쳐 들소를 울타리 밖으로 빼내는 데 성공한다. 이제 염소 무리에 뒤섞여 들소가 배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위대한 탈출의 승리를 코앞에 두고 들소들이 멈춰 선다. 들소는 말한다. 바다를 보여 줘서, 태양이 떠오르며 하늘과 물이 황금빛으로 변하는 순간을 목격하게 해 줘서 고맙다고. 그러나 더는 갈 수 없으며, 남은 생은 공원에서 마무리하고 싶다고. 누구도 들소를 막을 수 없었다.
곧 떠나야 하는 배는 출발을 서두른다. 미지로 향하는 자유의 문이 닫히려 하는 것이다. 저 배에 타야 하는 건 들소가 아니라, 바로 너! 요하네스라고 말하는 헬렌. 과연 요하네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나는 독자들이 마지막 페이지를 꼭 직접 확인해 봤으면 좋겠다.
세상을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없다면 어떻게 ‘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웅은 앞으로 나아간다. 산다는 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2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