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에 뽑은 첫 차 올란도의 누적 주행거리가 19만 3000 킬로미터를 넘었다. 우리 가족의 유일한 자동차인 올란도는 정말 훌륭하고 유능하게 작동해 주었다. 지금까지 맞벌이 4인 가구인 우리는 차 한 대로 생활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2026년 3월부터는 아내가 차를 타고 출퇴근을 해야 하므로 차량 두 대가 필요하게 된다. 그전에 차를 한 대 더 구입하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 올란도가 멀쩡하게 잘 작동하므로 경제적 건전성을 고려하면 최적의 차량 구입 시기는 2025년 말 또는 2026년 초이다. 분명 대출이 남아있던 3년 전이었다면 망설이지도 않고 차를 천천히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나는 번뇌에 시달리고 있다.
아파트 대출을 모두 정리하고 나자 욕심이 생겼다. 조금 일찍 차를 당겨 사도 되지 않겠냐는 욕심 말이다. 당연히 차를 일찍 사면 기존의 올란도는 그냥 주차장에서 놀아야 한다. 아내와 아이들이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학교에 다니므로 차가 필요하지 않다. 학원이나 상가도 걸어서 이용할 수 있기에 그야말로 욕심에 따른 차량 구매 욕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아내에게 나의 욕심을 솔직히 말했다. 고백이랄 것도 없었다. 최근의 나는 유튜브로 백 날 천 날 차 리뷰에 빠져 살았다. 아내는 그렇게 좋아하는데 뭘 미루냐며 아무거나 사라고 했다. 나는 전생에 거북선 노라도 저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당장 XC90을 사러 갈까?"라고 하기에는 재정의 한계가 분명했다. 그래서 최소한의 기준을 세웠다.
첫째, 오천 만 원 이내로 일시불 구매가 가능한 차. 우리는 자동차를 머리에 이고 살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 마음이 편해야 했다. 사자마자 주유소 자동세차기에 돌려도 벌벌 떨리지 않는 가격이 어디까지 인지 조율해 보다가 오천 만 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보다 비싸면 생활도구로서의 물건 감각이 흐트러 질 것 같았다. 자산이 많은 분들은 기준이 아마도 훨씬 높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금액 상한은 오천 만 원이었다.
둘째, 유지와 수리 면에서 불편함이 없는 차. 우리는 지방 소도시인 강릉에 산다. 대도시처럼 여러 자동차 브랜드 판매장이 있지 않다. 다행히 현대, 기아, 르노, KGM, 쉐보레는 판매점과 수리센터가 모두 갖춰져 있다. 강원도 영동지방에서는 거점도시라 그런지 하이테크 서비스 등 심한 훼손도 고쳐주는 중정비가 가능하다. 수입차량 브랜드로는 벤츠, BMW, 미니, 볼보 전시장이 있다. 이들 모두 경정비 서비스 센터를 함께 운영하고 있어 잔고장과 소모품 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셋째, 실용성과 안전성, 허영심을 적절히 충족시켜 주는 차. 나는 차량 전시장을 다니며 인정하게 되었다. 내 안에는 남에게 뽐내고 싶은 겉치레 가득했다. 단지 아내의 출퇴근 차가 추가로 필요할 뿐인데 나는 고급차에만 눈을 두고 있었다.
'올란도는 세컨드 카로 쓰고 새로 사는 차는 퍼스트 카로 쓰자. 그러니까 적어도 올란도보다는 크기나 성능 면에서 뛰어나야 한다.'
자기 합리화는 자동으로 이루어졌다. 허영심을 배제하면 선택지가 아주 넓어지겠지만 도저히 속세에 찌든 이 마음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미 속물이며 자동차 시장이 구축해 놓은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처음에는 이 사실을 깨닫고 괴로움에 몸부림쳤으나 받아들이기로 했다. 도저히 이성으로 납득이 안 되므로 적당히 허영심을 충족시켜 주기로.
명확한 기준은 아주 도움이 되었다. 선택지가 지나치게 넓은 것도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우선 오천 만 원이라는 기준이 대부분의 외제차를 날려주었다. 미니 클럽맨 정도를 살 수도 있지만 4인 가족이 패밀리카로 쓰기에 적당한 크기는 못 된다. BMW 1, 2 시리즈를 연말에 할인받아 사는 방법도 있지만 역시 사이즈 면에서 충분치 않았다. 결국 국산 중형 이상 차량으로 범위가 좁혀졌다.
국산차는 유지와 수리 면에서 불편함이 없다. 볼보처럼 전 차종이 가솔린 고급유를 넣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현대의 제네시스 라인만 가도 고급유를 권장하고 있다. 일단 고급유를 취급하는 주유소를 찾기가 불편할뿐더러 유지비가 높아지는 것이 싫다. 고급유를 넣는다고 차를 운행하는 사람의 가치가 고급스러워지지는 않겠지만, 고가의 가솔린 엔진 차량은 고급유를 필요로 했다. 돈 많은 분은 신경 쓰지 않겠지만.
이런저런 사안을 고려하고 나자 실용성과 안정성,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국산차의 범위가 확 좁아졌다. 현대에서는 그렌져와 싼타페, 팰리세이드. 기아에서는 쏘렌토와 K8, 카니발. 르노에서는 QM6와 그랑 콜레오스. KGM에서는 액티언과 렉스턴.
아내에게 차량 목록을 내밀며 이것만은 뺐으면 하는 모델을 말해 달라고 했다. 아내는 주차하기 곤란한 대형 차량을 콕 집었다. 5인 가족도 아니고 4인 가족인데, 가끔 아내가 운전할 일도 있을 텐데 차량 사이즈가 너무 크면 곤란한 듯 했다. 그래서 팰리세이드와 카니발, 렉스턴은 제외되었다. 나머지는 내가 끌리는 대로 해도 좋다고 선택권을 주었다.
나는 정보를 모으기 위해 자동차 카페에 가입했다. 차종 별로 카페가 활발히 돌아가고 있었다. 저마다 본인의 차량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게시판마다 애정이 가득했다. 반려동물 카페와 분위기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산부인과에서 아이가 태어나듯 출고된 차를 소개하고, 때때로 개성 있는 튜닝을 자랑했다. 자동차 취미를 제대로 즐기는 분들이 모인 곳이었다.
신나게 카페를 돌아다니며 게시물을 섭렵하던 중 마음이 번잡해지는 경험도 여러 번 했다. 나의 차를 아끼는 마음이 너무 커서 그런지 다른 차종을 비난하는 흐름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심리상 나와 실제적으로 경쟁이 될 만한 대상에게 저항감을 느낀다고 한다. 가령 일론 머스크가 말도 안 되게 거대한 부를 차지하는 현상에는 조금의 질투심도 나지 않지만, 대학 동창이나 어린 시절부터 고만고만하게 지내왔던 친구가 잘 나가기 시작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인간은 자기를 기준으로 플러스 마이너스 1 정도에 해당하는 범위에서 반응하는 것이다.
최근 르노에서 그랑 콜레오스라는 중형 SUV를 출시했다. 홍보팀 직원의 혐오 표현으로 크게 이슈가 되기도 했던 차량이다. 거액의 차량 개발비에 비해 시작이 꼬였다는 평을 받았다. 그런데 차량이 공장에서 출하되며 긍정적인 시승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이브리드 차량의 주행성능과 정숙성, 시트 착좌감이 뛰어나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여기까지는 별 갈등이 없었다.
문제는 한 유튜버가 그랑 콜레오스와 싼타페를 비교하면서 싼타페 카페가 시끄러웠다. 언덕길 주행 장면에서 싼타페 하이브리드의 성능을 부정적으로 다루었다며 성토가 이어졌다. 하도 논란이 크길래 나도 해당 영상을 보았다. 그랑 콜레오스와 싼타페를 외관, 주행성능,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등 여러 요소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었다. 확실히 언덕길 영상에서는 그랑 콜레오스의 손을 들어주는 듯한(만일 차에 손이 있다면) 뉘앙스가 느껴졌다.
영상을 정리하자면 공간과 각종 편의 면에서 싼타페가 우위에 있지만, 하이브리드 구동 시스템과 조향 면에서 그랑 콜레오스가 앞선다, 로 간추려질 수 있었다. 다른 유튜버의 시승기를 참조해도 대체로 평은 비슷했다. 차량의 객관적 특성이 그런 한 것이다. 그런데 그랑 콜레오스 카페와 싼타페 카페에서 상대 차량을 향한 깎아내리기 공격이 폭주했다. 표현은 적나라했다. 원색적인 비방도 서슴지 않았다.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했던 것은 '급 나누기'였다. 그랑 콜레오스 카페에서는 하이브리드 구동계와 하체 안정성, 조향 면에서 억지로 덩치만 키운 오르막 빌빌이 '싼타페'와 급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반면 싼타페 카페에서는 애초 차량 크기와 유틸리티, 정비편의 면에서 중국산 택갈이 근본 없는 '그랑 콜레오스'와 급이 다르다고 쏘아붙였다.
도대체 '급'이 무엇이기에 이리도 자존심을 세워 가며 싸우는 걸까. 안 그래도 아파트 평수와 주소로, 직업으로, 집안으로 사람을 차별하려 들어서 피곤한 세상이다. 그나마 즐거운 취미 영역이 될 수 있는 자동차에서마저 촘촘하게 급을 나눠 생면부지 남과 위아래를 나눠가며 싸우는 모습이 썩 보기 좋지는 않았다.
'싼타페와 그랑 콜레오스 급 나누기 분쟁' 게시글을 들여다본 후유증은 컸다. 갑자기 사람들이 오래된 올란도를 어떻게 볼까? 새 차로 어떤 차를 사야 무시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생겨버린 것이다. 지금껏 나는 성실하고 건전하게 살아왔다는 작은 자부심이 있었다. 무리해서 분수에 넘치는 자동차를 구매하지 않았고, 꼼꼼히 수리를 하여 최대한 오랫동안 차를 몰겠다는 의지도 존재했다. 하지만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커뮤니티 전쟁터에 머물다 보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급 나누기'에 열심인 것처럼 여겨졌다.
오늘 낮에는 강릉 외곽의 카페에서 한가로운 한때를 보냈다. 그런데 카페에서 나오는 길에 우리보다 한참 어린 자녀를 키우는 집이 벤츠 세단에서 내렸다. 전동 트렁크 기능이 없는 하얀색 C클래스였다. 3인 가족의 인상이 참 좋았다. 평소와 달리 늙은 올란도가 눈에 들어왔다. 전에 없던 감정이었다. 아파트 주차장만 가도 값비싼 차량이 흔하다. X7에서 어린애를 태우든 내리든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급 나누기에 의식을 집중했더니 분별하는 마음이 생겨 기분이 나빴다. 있지도 않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초조함은 낯설고 불쾌했다. 점잖은 벤츠 부부와 귀여운 아이의 밝은 모습은 스쳐 지나가고, 벤츠 옆에 서 있는 내 올란도가 신경 쓰였다. 바보 같은 순간이었다.
당분간 자동차 커뮤니티를 끊어야겠다고 단단히 약속했다. 사람의 내밀한 욕망이 정제되지 않은 채 드러나는 곳에 있으면 없던 고뇌도 생겨난다. 광고로 후원을 받는 자동차 유튜브도, 자동차 블로그도 결국 사람을 자극시켜 주의를 끌고 돈을 번다. 그러니 적당히 재미있을 수준으로만 접근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끊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고.
수도원에 머무는 가톨릭 신부님과 산사의 스님은 환경을 조절함으로써 평정심을 유지한다. 숲의 오솔길을 걷는 스님은 뉴발란스를 신든, 고무신을 신든 정신이 흔들리지 않는다. 나에게도 산사와 수도원이 필요하다. 고요한 내면의 성소를 지키려면 인터넷에 발길을 끊어야 한다. 바깥 상황이 나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어지러운 것이다. 모두 내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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