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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민 NIRVANA Dec 31. 2020

넷플릭스 TV콘텐츠<라그나로크>

현대에 다시 시작한 신과 거인의 전쟁

한 여성이 두 아들을 데리고 '에다'라는 이름의 외진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간다. 두 아들 중 맏이인 망네는 자기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해 때때로 사고를 일으켰던 이력이 있다. 망네가 지닌 정서적 장애는 이들 가족이 안고 있는 고민이기도 하다. 하지만 심성은 착한 망네는 마을 어귀에서 만난 노파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던 초자연적인 힘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불어 작은 산간마을을 지배하고 있는 지주 가문의 수장 비달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초자연적인 힘을 갖고 있으며 아득한 옛날부터 정해진 숙명의 적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기로에 선다.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중인 스칸디나비아 TV드라마 <라그나로크>의 줄거리이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 드라마는 흔히 북유럽 신화라고 부르는 노르딕 신화의 마지막 장 "라그나로크"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아마도 마블 팬들에게는 토르를 주인공으로 하는 3부작 중 마지막편인 <토르: 라그나로크>를 떠올릴 테고, 필연적으로 두 작품은 비교될 수밖에 없다.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는 <토르:라그나로크>에 비하면 이 드라마는 다소 심심하고 지루할 수도 있다. 6부작이라는 긴 호흡을 지닌 내러티브는 두 시간 남짓한 영화와 비교해도 텐션은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이 드라마는 훨씬 더 원전의 이야기에 충실하다. 그래서 숨어있는 얘깃거리를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제 그 보물찾기를 한번 해보자.



망네는 작중 노르딕 신화의 대표적인 영웅신인 토르의 환생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힘을 자각한 망네가 집안에 굴러더니는 망치를 던지는 장면에서 입증된다. 이미 마블 영화에 익숙한 팬이라면 토르에게는 묠니르라는 신묘한 힘을 지닌 망치가 있다는 것을 이젠 상식처럼 알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묠니르는 산을 평지로 바꿀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무기이다. 토르가 둔기인 망치를 무기로 삼고 있는 것은 그가 벼락이 아닌 천둥의 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마블 영화에서 토르는 오딘의 아들로 등장하지만 실제 신화에서는 좀 다르다. 오딘과 토르는 숭배지역이 달랐다. 몇몇 문헌에서는 오딘과 대지의 여신 표르긴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하르바르드 음률시' 같은 문헌에서는 또 서로 경쟁하는 사이라고 묘사되고 있다. 아마도 힌두 신화가 그러하듯 민족 간의 이동과 지배 구조가 바뀌면서 서로의 신화가 뒤섞이고 재정립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망네는 신화 속 토르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힘을 소유하게 되는데 그것은 작중 망치를 아득히 멀리까지 던지는 장면으로 표현된다. 마치 토르가 묠니를 던지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망치에 알파벳 M과 비슷한 룬문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룬문자는 고대 게르만 민족이 사용했던 고유의 표음문자로 '게르만 룬 문자', '앵글로색슨 룬 문자'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룬 문자' 세 계통으로 나뉘는데 마법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고 전해지며 점술이나 제의에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작중에 망치에 새겨진 룬 문자는 '만(man)'으로 필멸자인 인간을 상징한다. 마치 신적인 존재가 평범한 소년 망네로 환생한 것을 표현하는 메타포로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점술적 의미로 해석할 때 이 룬 문자는 예측핳 수 없는 미래이지만 주어진 필멸자의 삶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신에서 인간으로 환생한 토르/망네가 새로운 삶의 여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래서 망네가 망치를 던지는 장면은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연출이다.



노르딕 신화는 신과 거인의 끊임없는 대립을 노래하는데, 이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로 신/망네와 거인/비달의 대립이 주된 플롯이다. 정체를 숨기며 살아가는 거인족의 후예 비달은 에다라는 마을을 지배하는 지주 가문의 수장이다. 그는 망네에 필적, 아니 능가하는 힘을 소유했으며 아직은 미숙한 청년인 망네와는 다르게 완전한 서인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힘이 아닌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망네를 압도한다. 망네는 미숙하고 성급한 사춘기 소년 같은 언행을 보이는데 신화 속 토르 또한 성질 급하고 아둔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시즌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진짜 힘에 눈 뜬 망네가 벼락을 불러들여 비달과 함께 쓰러지며 무승부를 이르고 막을 내리는데 이후 시즌2에서는 어떤 대립 구도를 이룰지 자못 궁금하다. 신화와는 다르게 거인족이 지배층으로 묘사되는 점도 흥미로운데, 신화 시대를 지나 물질문명인 현대 사회에서 '신'은 잊힌 존재이고 훨씬 욕망에 충실하고 속물적인 '거인'이 필연적으로 선점할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것 같다. 신과 거인의 대립은 노르딕 신화만이 아니라 그리스신화에서도 등장한다. 넷플릭스의 또 다른 오리지널 콘텐츠인 <블러드 오브 제우스>에서도 '신과 거인의 대립'이라는 오래된 테마를 다루고 있다. 



노르딕신화의 <라그나로크>는 신들의 황혼, 즉 거인과의 전쟁에서 승자가 없이 신도, 거인도 모두 사라지는 종말을 노래하는 반면에, 그리스신화의 <기간토마키아>는 좀 양상이 다르다. 우라노스와 가이아가 낳은 티탄족에 이어 3세대 신들인 올림포스 신들은 그 영원할 것 같은 전쟁에서 기어이 승리를 차지하고 확고한 지위를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전승에서는 대영웅 헤라클레스가 신들의 최종병기로 등장해 거인들을 물리치지만 <블러드 오브 제우스>에서는 오리지널 캐릭터 '헤론'이 그 역할을 맡아서 전쟁을 종식시킨다. <기간토마키아>는 그리스신화 전반부의 최종장 같은 이야기인데, 거인과의 오랜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머쥔 신들이 묘하게도 이것을 기점으로 점점 무대에서 퇴장하며 후반부에 해당하는 <트로이 전쟁>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조연으로 밀려나고 인간들의 시대가 열린다. 그런 면에서 <라그나로크>와 <기간토마키아>는 이란성 쌍둥이처럼 닮은 점이 있다.



다시 드라마 <라그나로크>로 돌아가서, 작중에 비달의 자녀들이 학우들을 초대해 파티를 벌이는 신이 있다. 이 파티 장면은 단순히 청소년들의 일탈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프레이야로 상징되는 마녀, 혹은 여사제가 주관하는 고대제의를 연상시킨다. 프레이야는 노르딕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으로 그리스신화의 아프로디테와 같은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 본래 프레이야는 반(Vanir) 신족으로 오딘으로 상징되는 아스 신족과 병합하면서 노르딕신화의 판테온에서 중요한 자리를 꿰차는데 그녀는 때때로 '마녀'로 묘사되기도 한다. 젼승에 따르면 날개옷을 소유하고 있는데 이것을 쓰면 매로 변신해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고 한다. 또 그녀는 노르딕신화의 대표적인 팜므파탈로 물욕이 강해 브리싱가멘이라는 목걸이를 탐내 소유주인 난쟁이들과 동침까지 한다. 그리고 그 일은 로키의 고자질로 오딘을 분노하게 만들어 난장이들과 전쟁을 벌이는 원흉이 되어버린다. 마치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었던 헬레네처럼. 이렇듯 프레이야는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는 마녀로서도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녀의 마법 제의에는 성적인 요소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비달의 자녀들이 벌이는 환각파티 장면에서 프레이야와 프레이야를 따르던 여사제들이 춤과 약초를 통해 트랜스 상테에 빠져 예언을 하거나 주술을 행하는 셰이드마법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시즌1은 6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야기로 치자면 긴 프롤로그처럼 느껴진다. 망센이 자신의 힘과 운명을 자각하고, 필생의 적이 누구인지 깨달아가는 과정, 그리고 비로소 주어진 숙명에 맞서는 피날레까지. 그러기에 시즌2가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지 더욱 궁금해지는 면도 크다. 원전인 <라그나로크>는 신들의 황혼을 다루지만 사실 완전한 종말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재생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신들과 거인이 사라진 세상에서 환란을 피해 살아남은 리프와 리프트라시르가 자손을 낳고 그 자손들이 번창해서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현대에 다시 불붙은 신과 거인의 전쟁이 어떤 결말에 이를지 알고 싶기에, 드라마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전승처럼 불멸자들이 사라지고 필멸자들의 시대가 열릴지, 아니면 망네가 전쟁에서 승리해 새로운 신화를 이어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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