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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 Dec 30. 2015

리버풀 FC, 그 찬란한 역사의 시작 Part 3

[다니엘의 'Football Mate'] 축구를 좋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축구 전문가가 될 때까지.

알면 알수록 벅찬 감동을 선사하는 축구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 끝나지 않는 리버풀의 시대


당시 리버풀과 영국에서는 빌 샹클리와 밥 페이즐리 감독이 만든 영광의 시대를 이끌 새로운 리더가 누구인지에 초유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밥 페이즐리 감독은 당시 셰필드 웬즈데이를 맡고 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전드 '바비 찰튼 경'의 형인 재키 찰튼을 추천했다. 하지만 리버풀이 접근했지만 재키 찰튼은 감독직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빌 샹클리 감독이 페이즐리를 선임했던 것처럼, 페이즐리는 자신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리버풀을 사랑하고 샹클리와 본인을 보좌한 '조 페이건'에게 왕좌를 넘긴다.

조 페이건,  Joe Fagan

Part 1, 2에도 얼굴이 자주 등장하는 조 페이건은 샹클리와 페이즐리의 시대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샹클리가 리버풀에 부임시키고 이후 굳건히 리버풀의 영광을 함께한 부트룸의 일원 중 한 명이었다.

페이건은 부임 후 자신의 색깔을 입히는데 시간을 많이 소요하지 않았고 그의 감독 첫 시즌 1983/84,

리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누르고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잉글랜드 밀크 컵(현 캐피탈 원 컵) 우승, 

유러피언 컵(현 챔피언스리그)에서는 AS로마를 꺾으며 달성하며 트레블을 달성한다.

첫 시즌을 성공적으로 이끈 조 페이건은 또 하나의 리버풀의 영웅으로 등극했고 그의 시대는 그렇게 계속해서

승승장구할 거라고 모두가 입을 모았다. 하지만 페이건의 리버풀에게는 크나큰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다.


# 비극으로 변해버린 결승전, 헤이젤 참사


조 페이건 감독이 이끄는 리버풀은 1984/85, 그의 부임 두 번째 시즌에도 유러피언 컵 결승에 진출한다.

리그 우승과 리그컵 등 다른 트로피들을 놓쳤기에 유러피언 컵 결승은 리버풀에게 기회 중에 기회였다.

1985년 5월 29일, 벨기에 헤이젤 스타디움에서 이탈리아의 명문 유벤투스와 리버풀의 경기가 시작됐다.

경기 시작 전부터 양 팀의 서포터즈들은 말싸움부터 시작해 물병, 음식, 각종 물건들을 던지며 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이때 화가 난 리버풀 훌리건들이 양 팀의 팬들을 분리시켜놓은 펜스를  넘어가 유벤투스 서포터즈와

난투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주체시키지 못 할 만큼 화가 난 리버풀 팬들의 공격에 유벤투스 팬들은

무서움에 덜덜 떨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유벤투스 팬들은 코너 쪽으로 몰리게 되었고 경기장을 빠져나가려고

벽을 타고 넘어가려는 시도가  계속됐다. 이때 오래되어 낡아 그 많은 사람들을 지탱할 힘이 없던 그 벽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대참사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1985년 5월 29일, 헤이젤 참사 당시의 모습

사망자와 부상자는 속출하기 시작했다. 사망자는 총 39명, 부상자는 약 500명 가까이 발생했다.

대부분의 사망자와 부상자들은 유벤투스 팬들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피해는 속출했다.

이러한 대참사가 벌어지는 도중에도 경기는 중단 없이 진행되었고 리버풀은 유벤투스에게 우승을 빼앗긴다.

결국 리버풀은 챔피언스 리그 우승도 놓치고 응원문화의 젠틀함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참사 이후 UEFA는 잉글랜드 클럽들에게 향후 5년 동안 유리피언 컵의 참여 자격을 박탈했고 리버풀에게는

10년 동안 자격을 박탈한다. 물론 이후 7년으로 줄어들기는 하지만 이는 충분히 납득할만한 대응이었다.

이 사건을 일으킨 주동자들, 리버풀 훌리건 28명은 구속되었고 이 사건 이후에 잉글랜드 축구 서포터즈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온 하나의 큰 비극으로 아직도 추모행사는 매년 이루어지고 있다.

헤이젤 참사 추모 현판

헤이젤 참사 이후 조 페이건 감독은 부임 2년 만에 팀을 안타깝게 떠나게 되고 공석이 된 감독석은 리버풀의

레전드이자 당시 최고의 주가였던 케니 달글리시가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 고난을 이겨낸 극복 


케니 달글리시는 한치의 의심도 없을 만큼 리버풀 최고의 선수였다. 리버풀 팬들은 그를 '킹 케니'라고 

부르는데 사실 처음 리버풀에 그가 왔을 때에는 케빈 키건의 대체자라는 무거운 타이틀을 등에 메고 안필드를 밟지만 그는 키건보다 더욱 큰 활약을 펼치며 리버풀에서 첫 시즌부터 팀내 최다 득점을 올린 선수였으며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선수였다. 이런 그가 처음 감독을 겸임할 때 반응은 엇갈렸다. 

선수와 감독은 다른 것이라며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과 그가 리버풀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는 

사람들 둘로 나뉘었다.

'킹 케니' 케니 달글리시(Kenny Dalglish, 가운데)

그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 속에 1985/86 첫 시즌을 치렀고 그는 뛰어난 리더십으로 팀을 이끌며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컵을 따내며 부임 첫 시즌 더블 우승을 달성한다.  

이후 86/87, 87/88, 88/89, 89/90, 90/91 시즌  그가 감독으로서 이끌던 모든 해에 최소 1개 이상의 

트로피를 매해 들어 올렸다. 그는 선수뿐만이 아니라 감독으로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리버풀 역사에서도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달글리시가 헤이젤 참사로 겪은 아픔들을 여러 번의 우승컵들도 지워나가

지만 헤이젤 참사보다도 더 한 세계 축구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 1989년 그들에게 찾아온다.


# JUSTICE FOR THE '96', 힐스보로 참사


1989년 4월 15일, 리버풀은 축구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리버풀은 FA컵에서 준결승전에 진출했고 노팅엄 포레스트와 결승전 티켓을 두고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바로 그 준결승전 경기가 열리던 곳이

셰필드 웬즈데이의  홈구장인 힐스보로 스타디움이었다. 힐스보로 스타디움은 양 팀의 서포터즈들이 격리 수용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큰 경기에 많이 사용되던 경기장이었다. 경기 당일 많은 인원이 몰릴 것이라고 

생각한 FA는 방송과 라디오를 통해 티켓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안전상의 문제로 오지 말라고 권고까지 했다. 하지만 경기 시작 20분 전, 갑자기 약  5천명가량 되어 보이는 리버풀 서포터즈들이 경기장으로 몰려

왔고 너무 많은 인원이 갑자기 몰려들어 경기장 입구의 회전문을 이용해 사람들이 입장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경찰과 관계자들은 출구로 사용되던 일반 게이트를 리버풀 팬들의 지정석인 레핑 레인으로 입장을 시키기 시작했는데 이 부분이 문제였다. 출구로 사용되던 일반 게이트는 회전문을 가지고 있지 않아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입장하게 되면서 원래 경기장에 이미 들어가 자리를 잡고 있던 다른 팬들을 밀고 

들어간 것이다. 입석으로 모두 서서 자리를 빼곡하게 채워져 있던 곳에 급격히 몰린 5천명이 밀려들면서 

미리 자리를 잡고 있던 팬들이 그 압력에 피해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힐스보로 참사 당시의 사진

이미 한계치를 넘어선 경기장 내부였지만 뒤에서 입장하는 팬들은 이를 알리가 없었고 경기를 놓치기 싫었던

사람들은 앞사람을 밀어붙이며 입장을 하려 했던 것이다. 원래 경찰과 관계자들은 수용 한계 인원을 초과하면

입장을 막아야 하는데 이날은 전혀 아무런 제제도 없었으며 나중에 이에 대해 제대로 된 해명조차 없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서 있는 체로 앞뒤의 압력에 의한 질식사를 당해 사망했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팬들은 펜스를 타고 경기장으로 넘어가려고 시도했다. 또한 입장하던 층의 바로 위층, 웨스트 스탠드에 있던 

팬들은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올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던 중 펜스의 작은 문이 열렸고 사람들이 대거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관중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경찰, 구급대, 경기장 관계자들만으로는 사태를 진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부 관중들은 부상자들에게 심폐소생술을 하기도 했고 큰 부상을 부상당한 사람들을 등에 업고 구조에 힘쓰고 있었다. 경찰의 사고 대응 방법이 문제였다.  일부 경찰관들은 리버풀 팬들이 노팅엄 포레스트 관중석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저지선을 만들었고 이는 더 큰 문제를 가져왔다.

부상당한 팬들을 직접 구급차로 데려가기 위해 경찰의 저지선을 넘어가려던 일부 팬들은 이 멍청한 경찰들에

의해 저지당하고 만 것이다. 사건 발생 후 후속조치 미숙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고 목숨을 

잃게 되고 말았다. 이 날 목숨을 잃은 사람은 무려 94명, 부상을 입은 사람을 무려 760명에 달했다.

힐스보로 참사 당시의 사진

사망자는 4일 뒤 14세의 소년이 결국 세상을 떠났고 이후 4년 뒤 혼수상태였던 팬 한 명도 결국 목숨을 잃어

총 96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이 사건으로 전 세계가 떠들썩했고 축구계에서도 변화와 개선의 바람이 불었다.

힐스보로 참사를 통해 영국 축구계는 모든 경기장을 좌석으로 바꾸었고 경기장 개선에 힘썼다. 

또한 이는 재판까지 이어졌고 판결은 경찰들이 관중들을 단속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됐고  이 말은 

경찰에게 잘못을 묻는 것도 맞지만 무질서하게 입장하던 리버풀 팬들도 죄가 있다는 판결이었던 것이다.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들과 리버풀 서포터즈들은 법원의 판결을 인정할 수 없었고 또한 거짓으로 조작되어 

있는 조사 결과들을 신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힐스보로 독립 패널'을 만들어 다시금 재수사 요청과 진실을 밝혀내려 노력했다. 결국 재수사는 이루어졌고 경찰이 증언을 조작하고 영국의 일간지 '더 선' 이용해 여론까지 조작한 것이 드러나면서 진실이 세상 밖으로 드러났고 희생자들의 죽음에서 억울함을 씻어낼 수 

있었다. 힐스보로 참사 이후 1991년 케니 달글리시 감독은 사임했고, 리버풀에서 선수생활 전성기를 보냈던

그레엄 수네스가 지휘봉을  이어받으면서 리버풀은 몰락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케니 달글리시 인터뷰 중, 기자 : 케니, 리버풀이 아니라면 어느 팀에서 뛰고 싶나요?

                                         케니 : 리버풀 2 군이요.


Part 4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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