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글'로 커리어를 쌓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꿈꿔봤을 직업, 카피라이터. 카피라이팅에 대한 내 열정이 활활 타오르던 과거의 어느 날. 우연히 유병욱 Creative Director님이 진행하신 온라인 카피라이팅 캠프에 참여했고, 그 이후부터 유병욱 CD님의 강의와 책들은 내 글쓰기에 길잡이가 되어왔다.
신간 <인생의 해상도>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곧바로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인생 멘토랑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대화하는 기분으로 이 책을 읽었다. 커피 향과 함께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쏟아내며 위로받는 대화. 그러다 몰랐던 공통점을 발견하고 꺄르르 웃고, 일상 이야기 중 툭 튀어나온 인생 조언에 눈시울도 붉어지는 그런 대화. 책을 통한 작가와의 대화에 푹 빠지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그래서 꼭 리뷰를 남겨두고 싶었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이 순간과 생각이 날아가기 전에 꼭 잡아두고 싶어서.
몇 년 만에 유병욱 작가의 북토크가 열린다는 인스타 포스팅이 올라왔다. 작가님을 만나고 온 후기와 함께 브런치를 남길까 했지만 두어 번 열린 북토크는 모두 빠르게 마감되었다. 다음 기회가 또 있기를 바라며, 대신 오늘은 책을 통해 (나 홀로) 나눴던 멘토와의 대화를 리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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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간직하고 싶은 단어와 문장이 유독 많다. 가장 좋았던 부분 중 하나는 챕터의 구성. 일상의 해상도를 높이기 위한 여섯 가지 도구 - 센서, 관점, 겹, 음미, 창조, 매일 - 가 각 챕터를 통해 차근차근 소개된다.
얼핏 보면 그저 쉽게 펼쳐놓은 단어 같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이 단어를 골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책에 펼쳐진 수많은 이야기가 모이고 모여, 두 글자 단어들에 압축되어 놓여있는 느낌. 그래서인지 책을 다 읽고 챕터만 다시 돌아봐도 두 글자들이 품고 있는 메시지들과, 내가 책에 밑줄 친 문장들이 다시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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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욱 작가는 이전 글과 강의에서부터 새로운 세계에 빠지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고 말해왔다. 평소 벽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시도해 보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문이자 길로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멋진 조언을 들고도, 그동안 과거의 나는 문을 열지 못했다. 딱히 이렇다 할 목표나 열정이 없는데 문을 열려고 해도 되는 걸까. 문이 안 열리면 어떡하지. 문 여는 시도조차 시간 낭비였다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겁을 먹고 도망부터 가기 바빴으니까. 작가는 이런 내 머릿속을 꿰뚫어 본 듯, 책을 통해 이런 말을 건넨다. 문 앞에서 너무 주저할 필요 없다고. 원래부터 열리지 않은 문이 많으니 열지 못했다고 창피해할 필요 없고, 뚜렷한 목표가 없어도, 결과가 예측되지 않아도 괜찮으니 용기 내서 눈앞의 문을 열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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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작가의 다른 책 후기에서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표현하기 어려웠던 감정이나 생각을 선명히 표현해 준다'는 말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읽은 책 리뷰 중 가장 예리한 리뷰가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책을 펼친 순간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바로 이거야!'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어 짜릿했고, 행복했다. '그냥'이라는 안갯속에 묻혀뒀던 막연한 생각과 감정들을 선명하게 들여다보고,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글들.
무엇보다도 내 스마트폰 가져다가 앨범과 플레이리스트 훑어보며 쓴 글이라고 해도 믿길 만큼 너무 내 취향 깊숙한 곳에 숨겨있던 것들이 튀어나와 있어서 놀랍고 기뻤다. 인류학과 출신이라는 공통점, 런던을 제2의 고향처럼 느끼는 감정과 내셔널 갤러리 앞에서의 감상, 에디 하긴스 트리오와 아비치, 리베르탱고를 동시에 좋아하고 내 최애 플레이스중 하나인 신사 탭샵바 (여기서 회식하는 사람들 자주 봤는데, TBWA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괜히 설렌다)의 스크린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있다니. 사실 단순히 대중적인 취향에서 오는 겹침이겠지만, 이 공통점들에 자꾸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나와 어딘가 닮아 있는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속 멘토였던 작가에 대한 애정이 더더욱 커졌다.
아래는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책을 읽다 불이 들어온 문장들. 나의 센서에 걸려 더 깊숙한 곳까지 도달한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센서 - 평범한 매일 속에서 좋은 것을 찾는 능력
매혹은 결코 우연으로 얻어낼 수 없어요, 세상엔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만들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32p)
그것은 당신만의 깊이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당신이 남들과 구별되기 위한 필연이며, 평평한 당신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조각칼입니다. (33p)
관점 - 골라내는 기준
무엇을 고르냐에 따라 내 소중한 시간은 쓰레기 같은 것들로 채워진 채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고, 밀도 있는 양질의 아름다움으로 채워질 수도 있습니다. (54p)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곁'이 될 만한 사람을 찾으세요. 그리고 그 곁으로 가세요. 생각에도 인생에도 반려자가 필요합니다. (63p)
겹 - 더 풍부하게 느끼게 해주는 필터
무용한 것을 사랑스럽게 보는 눈에서 의외로 놀라운 세계가 포착돼요. 쓸모없음을 미리 판단하지 말고 꾸준히 세계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탐구해 보세요. (131p)
문 앞에서 너무 주저할 필요 없다는 것. 원래부터 열리지 않은 문이 많으니 열지 못했다고 창피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 (...) 뚜렷한 목표가 없어도, 결과가 예측되지 않아도 눈앞의 문을 열어보세요. (134p)
음미 - 더 잘 흡수하는 습관
그 순간의 앞뒤 기억은 모두 사라졌지만 단어로 고정시켜 놓은 그 순간만큼은 생생해요. 메모의 능력입니다. (148p)
우리 앞에 놓인 세상을 의도적으로 요소 하나하나를 분리해서 감상해 보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떠올려보고, 그것을 만든 이에 대해 더 알아보고, 때론 정반대로, 흐린 눈으로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해 보세요. (174p)
창조 - 만들어라, 더 잘 즐길 것이다
그러니 '내가 뭐라고 뭘 만드나'라며 미리 단념하지 말고, 내가 가진 것들을 들여다보고 그중 가장 힘 있는 것을 꺼내놓기 시작해 보세요. 그것이 내 앞에 놓인 세상의 해상도를 신기할 정도로 높여줍니다. (197p)
이렇게 하면 멋있어 보일 것 같아서 나에게 없는 것을 자꾸 만들어내려 하지 마세요. 그곳에서 좋은 결과물이 나올 가능성은 없습니다. (...) 나는 어떤 아이였나, 전 생애를 걸쳐 나는 늘 무엇에 마음을 빼앗겼고, 어떤 순간에 가장 큰 기쁨을 느꼈는가를 돌아보세요. (208p)
'굳이'는 남들이 당신을 공격할 때 쓰이겠지만 밖에서 당신을 찾기 시작한다면 아마 당신의 그 '굳이' 때문일 거예요. 당신의 매력은 아마, 그 '굳이'에서 시작될 겁니다. (211p)
매일 - 꾸준히 내놓는 삶을 만드는 비밀
창조를 계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찾은 답은 '좋은 매일의 반복'입니다. (232p)
온 힘을 다한 과정이 끝나면 반드시 무언가 남습니다. 결과는 바로 내 손에 쥐어지기도 하지만, 때론 아주 천천히 도착하기도 합니다. (252p)
정말로, 그 밤은 사라지지 않아요. 진심으로 마주했던 일의 과정은 때론 결과보다 더 깊은 흔적을 남깁니다. (25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