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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상수첩 Aug 27. 2020

알약 삼키기

 나는 거의 성인이 될 때까지도 알약을 잘 먹지 못했다. 병원을 가면 최대한 가루약을 받아 먹었고 어쩔 수 없이 알약을 받으면 약을 굳이 으깨서 가루를 만들어 물과 함께 삼켰다. 내가 약을 먹는 모습을 관찰한 사람들은 굳이 쓴 맛을 찾아가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곤 했다.


 알약을 먹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을 너무나 잘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식후 30분이 되면 반복되는 무수한 시도가 있었다. 첫째 오늘은 기필코 이 알약을 그대로 삼켜보겠다며 심호흡을 하고, 둘째 바구니 모양으로 편 왼손에 알약을 탈탈 털어 담고, 셋째 속으로 하나-둘-셋을 외치며 알약과 함께 물을 한 모금 마시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것은 오직 물뿐이었고 알약이 넘어가려고 할 때는 예외 없이 문이 닫혔다.


 알약 삼키기는 어린 시절의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였지만 정작 아주 쉽게 성공을 했다. 공부에 바빠 약 따위를 신경 쓸 여력이 없던 고등학생 때 쯤인가, 아무렇지도 않게 알약 서너알을 물과 함께 삼켜낸 것이다. 심지어 그 순간에는 별다른 의식조차 못했던 것 같다. 마치 처음부터 약을 잘 먹었던 사람처럼 쿨하게 약봉지를 정리했다.


 알약의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것은 요새 회사에서의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부터는 하루에도 몇 번씩 뉴스에 나오는 중요한 클라이언트에 대한 회계감사를 하고 있다. 클라이언트 담당자들도 예민하고 상사 분들도 꼼꼼하게 리뷰를 하기 때문에 나는 점점 소극적으로 변한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한 나머지 몸과 마음이 경직되고, 그러다 보니 평소 하지도 않던 잔실수를 오히려 하게 된다.


 '꼭 잘 해내야만 한다'고 힘을 잔뜩 주는 것이 때로는 어떤 일을 가장 못하게 만드는 방법인 것 같다. 알약을 삼켜내야만 한다고 간절히 염원할 때 정작 한 알도 삼켜내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반기부터는 힘을 살짝 빼고 살아가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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