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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Sep 17. 2021

금요일에 쓰는 여자

모성은타고나는것인가?

열 살 어린이들과의 책 수업 시간.

오늘따라 재우는 영 집중을 못 하고 있다.

의자로 스윙스윙 그네를 타다가 급기야 뒤로 넘어져 버렸고, “그러게 재우야 선생님이 의자 흔들지 말라고 세 번이나 얘기했잖니?”

우당탕 넘어지며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옆에 있는 소희의 의자를 잡고 넘어져서 졸지에 소희 가방이랑 필통까지 우르르 쏟아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우는 지우개 던지다 떨어 뜨리기 서너 번, 연필 굴리다 떨어뜨리기 네댓 번을 반복하면서 괜찮아질 만하면 수업 흐름을 번번이 끊었다.

한 시간 반 수업 동안 이미 의자 흔들다 넘어지기, 연필 지우개 떨어뜨리기, 화장실 다녀오기 등으로 수업의 1/3이 지나가고, 그럴 때마다 나는 한숨이 나와서 점점 표정 관리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네 명이 정원인 수업에  재우를 제외하고 모두 여자 친구들이다. 재우가 장난과 사고를 넘나드는 동안 이 세 명의 여자 친구들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재우가 장난치다 떨어뜨린 연필을 조용히 줍기 서너 번, 의자 뒤로 넘어진 재우를 일으켜 상태 확인하기 한 번, 교재 페이지를 잘못 찾아 우왕좌왕하고 있는 재우의 교재 펴주기를 또 몇 번. 세 명의 여자 친구들은 재우 앞자리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번갈아 가며  재우가 필요할 때마다 마치 수호천사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불평 한마디 없이 조용히 앉아 재우의 빈틈을 보조하고, 선생님이 불편할까 봐 제 몫을 다 하는 어린 천사들을 보며 나는 문득 숙연해졌다. 덕분에 수업은  삐그덕삐그덕 했지만,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잘 굴러가고 있었고, 수업 내내 나는 나보다 30년은 늦게 태어난 어린 천사들을 보며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생각하기도 했다.     


마지막 글쓰기 시간이었다. 

우리는 오늘 읽은 책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자신의 감상을 적어 내려갔다. 이 시간은 사실 누구에게나 즐거운 시간이 아니기에 아이들은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책임감으로 빈 종이를 채우기도 한다. 감상문을 다 쓰면 나는 아이들의 글에서 꼭 들어갔으면 좋겠는 얘기와 잘 이해되지 않는 모호한 얘기들을 구체적으로 써 달라고 부탁하고 아이들은 퇴고 후, 자신의 글을 읽는 것으로 수업은 마무리 된다. 그날따라 재우의 글쓰기 싫은 마음은 얼마나 커다랬는지 글씨는 정말 알아보기가 어려웠고, 날아가고 있는 글씨를 한 글자 한 글자를 짚어가며 의미를 짐작하며 재우의 글을 해석하는 것은 나에게도 재우에게도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낭독 시간, 재우는 자신의 글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하면 입도 떼지 않고 있었다. 발표할 때마다 부끄러워서 못하겠다는 재우가 발표할 때 말고는 얼마나 활달하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알기에 우리는 재우가 얼른 자신의 글을 발표하기를 숨죽여 기다렸지만 재우는 오늘 모종의 사건 사고로 이제 더이상 수업에 집중하기 힘들었는지 꾹 다문 입으로 발표를 거부하고 있었다.

“하아~”하고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려는 찰나, 서은이가 먼저 말했다.

   

“재우야 힘들어? 내가 읽어 줄까?”

“야 너는 아까는 목소리도 크더니 왜 안 읽어? 창피하면 눈 감고 우리가 너 안 쳐다볼게.”

“그래, 벌써 밖에 깜깜하잖아. 선생님도 힘드시겠다. 눈 감을 테니 니가 읽던가, 서은이한테 읽어 달라고 해.”    

 시간쯤이면 이제 집중력도 떨어지고 집에 가고 싶어질 만한데도 여자 친구들은 마치  누나처럼 엄마처럼 부끄럽다는 우를 다독이며 어서 해보라며 격려를 하고 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여기서 얼른 빨리 끝내라고 재촉하고 싶은 것은  마음밖에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나는 또다시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여자 친구들의 독려 덕분에 재우는 기운이 났는지 슬그머니 원고지를 서은이에게 넘겼다.

“음..나는.. 나는 오늘.. 나는.. 근데 재우야 이거 무슨 글씨야?”

“어디 봐봐! 나 이상한 글씨 잘 읽어.”

천사 세 명은 재우의 원고지를 한가운데 놓고 머리를 맞대어 놓고, 2차 세계대전 비밀의 암호를 푸는 거보다 더 진지했다.

“오늘 나는... 야 이게 무슨 글씨야. 이걸 어떻게 읽어. 너 이렇게 글씨 쓰면 엄마한테 안 혼나니?”

“재우야 차근차근히 써봐봐. 선생님도 모르겠다. 이건 정말.”

“이건 너 말고는 못 읽겠다, 정말. 포기!”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원고지를 다시 받아 든 재우, 여자 친구들의 한결같은 응원과 지지에 힘을 내 더듬더듬 자신의 글을 다시 읽다가 말했다.

“오늘 나는... 아... 선생님 저도 무슨 글씬지 모르겠어요. 다음엔 잘 쓸게요.”        


재우의 한 마디에 우리는 와하하 웃으며 유쾌하게 수업을 마쳤다.


이미 해는 저물어 깜깜한 밤이었고, 모두의 뱃속에 꼬르륵 소리가 요동을 치고, 자칫 예민해질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열 살 여자 친구들이 보여준 인내와 참을성, 자애로움에 우리는 누구 하나 상처입지 않고 아름답게 이 수업을 마칠 수 있었다.  

마냥 열 살 같았던 재우와 달리 재우를 다독이고, 선생님의 기분도 눈치채 주는 세 친구의 모습을 보며 감탄과 찬사와 함께 세상의 모든 여자를 떠올린 것은 늙은 선생님의 주책없음 때문인 건가. 아직 십 년도 채 살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들의 탁월한 타인에 대한 감수성과 배려를 보며 나는 왜 조금 속이 상했는지. 이토록 알아서 타인을 보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모성은 타고나는 것인가? 모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모성에 얼마큼 기대어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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