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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음 May 11. 2018

[시즌 2] 01. 부품의 탄생

Prologue 01. 6년 vs. 15년 : 부품의 탄생

#Prologue 01. 6년 vs. 15년 : 부품의 탄생


2011년 봄, 아직은 눈조차 녹지 않은 한라산을 힘겹게 걸어 오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한국 나이 스물 넷. 신촌 Y대 경영학과. 졸업요건은 거의 다 채운 것 같으나 이 학점으로 졸업하면 거지꼴은 못 면할 것 같은 신세. 한국공인회계사(KICPA) 시험 준비를 핑계로 휴학했으나 회계사라는 직업에는 관심 없음.


한 가지를 더 되물었다.

'그래서 뭐해먹고 살건데?'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가슴이 죄여오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질 뿐이었다. 나는 공연히 통증의 원인을 등산으로, 산이 너무 높은 것으로 돌리려 애쓰기 시작했다.




여행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온 후 간단한 시뮬레이션 모델을 한 가지 만들었다. 시뮬레이션의 주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재직자가 서울에 집을 마련하려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까?'였다. 이 질문에 대한 현실적인 답이 향후 진로와 미래를 좌우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장 보수적인 계산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요즘 들어 소위 이야기하는 '흙수저', 즉 대학 등록금은 전액 학자금 대출로 충당하였으며 지방에서 상경하여 월세 고시텔에서 생활 중인 경우를 가정했다. 목표 금액은 1억 5,000만원. 당시 살고 있던 집의 전세보증금을 참고하여 정한 금액이었다. 


학자금 대출을 갚고 1억 5,000만원을 모으려면 대기업은 6년, 중소기업은 15년이 걸린다.


중소기업에 가면 방 3개, 화장실 1개, 주방으로 이루어진 24평 아파트 한 채를 전세 계약하기 위해 꼬박 15년이 걸리는 구조라는 결론이 나왔다. 심지어, 개인 용돈이 제외되었으니 삼겹살에 소주 한 잔도 못 마시고 여행 한 번 못 가면서 15년을 버텨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부모님께 용돈 한 푼 못 드리는 불효녀가 되며 주위에 경조사비 한 번을 못 챙기는 민폐녀로 등극(?)해도 전세 계약까지는 15년이라는 적지 않는 시간이 드는 것이다.  

반면에, 대기업으로 취직하면 6년 만에 같은 전세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내 성격을 고려하면, 그 이상의 회사 생활은 무리일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여기까지 고려하고 나니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대기업에 가야 한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더 일찍 경제적인 독립이 가능할 것이다. 성격에 맞을 리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대기업의 '부품' 같은 노동자로 몇 년만 참고 고생해야겠다.


그렇게 나의 지난한 취업 준비 과정이 시작되었고, 이듬 해에는 영혼 없는 대기업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기업 생활 5년, 뒤돌아보니 2011년 봄의 예상과 큰 차이 없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성격에 맞지 않았고, 모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영혼 없는 직장인'이 되었으며, 그럼에도 월급과 성과급은 통장에 꼬박꼬박 쌓이는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야구 관람 등의 취미 생활을 부족함 없이 누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지출에 인색하지 않았으며, 매 해 두어번씩 해외 여행을 다녀왔음에도 5년 간 1억이라는 돈을 모았다. 대다수 직장인이 그러하듯 주식, P2P 금융, 가상화폐 등의 재테크에 관심을 가지게 됐으며, 이를 통해 약간의 추가 소득을 얻는 부수적인 성과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말을 떠올리며 살고 있었다. 통장에 돈이 쌓여가는 만큼 영혼은 공허해지고 있었다. '워라밸(Work-life Balance)'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 같고, 현실 세계는 '눈치'와 '정치'라는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뉴스에서는 '업무량 대비 재직자 수 부족으로 인한 중소기업 근로자의 초과 근무 수준이 심각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라는 멘트가 흘러 나오는데, 정작 나는 업무가 아닌 '눈치'와 '정치'를 위한 야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급여, 복지 혜택, 기업문화, 성장 가능성. 이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보장되는 대기업 생활이었음에도 '나'라는 사람이 스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더 이상 대기업이라는 햇빛 아래에 그대로 두면 '나'라는 아이스크림은 형체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냉장고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실패의 자유 Season 2'는 저의 5년 반에 걸친 직장생활을 되돌아보는 자전적 에세이입니다. 이번 연재물을 통해 대기업, NGO, 소셜벤처 스타트업이라는 서로 다른 업계의 경험을 하나로 묶어 취업/이직 준비생 여러분께 도움을 드리는 동시에 제 경험을 스스로 정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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