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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쉬플랏 Jan 23. 2022

와인, 그 신비로운 이야기에 대하여

최초의 와인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와인의 가장 오래된 흔적은 조지아의 점토 항아리 ‘크베리’에서 찾아볼 수 있고, 인위적으로 포도를 재배하여 와인을 담근 최초의 와이너리는 아르메니아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엄정한 방식으로 와인의 역사를 가늠하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중요한 일이지만, 오늘은 정확한 연대나 역사적 증거에 대한 걱정일랑 잠시 잊고 와인의 탄생을 묘사한 신화와 전설, 성서를 들여다보도록 하자. 아주 오래전의 인간들이 어떤 방식으로 와인을 바라보고 경험했는지는 이 재미난 이야기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을 테니까.


인간에게 공예를 가르치는 페르시아 신화 속 왕, 잠시드


한 여인을 절망에서 구원해 준 신묘한 음료


고대 페르시아 신화에 따르면 최초의 와인을 발견한 것은 피슈다드 왕조(신화 속 왕조로 실제 이 왕조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없다)의 네 번째 왕, 잠시드의 여인이다. 잠시드의 총애를 잃고 궁 밖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이 여인은 깊은 슬픔과 고통에 잠기는데, 설상가상으로 극심한 두통까지 생기자 삶의 의지를 잃고 만다. 그런 그녀가 떠올린 것은 ‘독’이라 쓰인 창고의 항아리였다. 자살할 심산으로 그 항아리 속 액체를 마신 여인은 곧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녀를 슬픔과 고통에서 해방시켜 준 것은 달콤한 죽음이 아니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더 이상 두통을 느낄 수 없었고, 오히려 전에 없던 활기로 생생했다. 사실 이 항아리 속에 들어 있던 것은 상해서 먹을 수 없게 된 포도로 궁의 일꾼들이 부패한 포도를 먹고 탈이 나자 독으로 분류해 방치 중이었는데, 여인이 마실 때쯤에는 알맞게 발효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인은 자신의 신비로운 경험을 잠시드에게 알렸고, 잠시드는 그녀를 다시 받아주었을 뿐 아니라 페르세폴리스의 모든 포도를 와인 양조에 쓰라고 명할 정도로 와인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다.


암펠로스와 디오니소스


디오니소스의 연인, 포도나무가 되다


‘와인’과 ‘신화’라는 두 단어를 함께 들으면 누구나 디오니소스 혹은 바쿠스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포도잎을 머리에 두른 모습으로 자주 묘사되는 디오니소스는 포도나무와 포도주의 신이자 황홀경의 신으로, 제우스와 인간 세멜레 사이의 자식이다(판본에 따라 페르세포네나 데메테르, 레테 등이 디오니소스의 어머니로 언급되기도 한다).


디오니소스의 인생, 아니 신생(?)은 초년부터 그다지 평탄치 못했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틈만 나면 바람을 피우는 남편 때문에 늘 화가 나 있었는데, 이런 분노는 종종 제우스와 다른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에게까지 뻗치곤 했다. 헤라는 꾀를 내어 세멜레가 제우스의 광채에 타 죽도록 만든 것은 물론 제우스가 죽은 세멜레의 배에서 꺼내 허벅지에 넣었다가 다시 탄생시킨 디오니소스를 호시탐탐 노린다. 디오니소스는 헤라의 추격을 피해 이모와 이모부에게 맡겨졌으나 이 사실을 안 헤라가 두 사람에게 광기를 불어넣자 이복형제인 헤르메스의 도움으로 니사(Nysa)산으로 몸을 피한다.


수소의 등에서 떨어지는 암펠로스와 그의 시체에서 자라난 포도나무를 가꾸는 디오니소스


니사가 정확히 어느 지역을 말하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동쪽의 어느 먼 지역이라는 이야기만이 전해질 뿐이다. 이곳에서 청소년기를 맞은 디오니소스는 아름다운 사티로스(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숲의 정령) 암펠로스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이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치기 어린 암펠로스가 수소를 조심하라는 디오니소스의 충고를 무시하고 수소 등에 올라 달의 여신 셀레네를 놀려댄 것이 화근이었다. 분노한 셀레네는 등에 떼를 보내 수소를 날뛰게 했고, 소에서 떨어진 암펠로스는 바위에 부딪혀 죽고 만다.


디오니소스는 연인을 묻고 그 위에 포도나무를 심었다(제우스가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암펠로스의 시체를 포도나무로 바꾸어 주었다거나 그의 무덤에서 저절로 포도나무가 자라났다는 버전도 있다). 무덤에서 포도가 자라 알맞게 익자 디오니소스는 즙을 내어 숙성시켰고, 포도주 양조 방법을 인간 세계에 전했다. ‘암펠로스’는 그리스어로 포도나무를 뜻한다.


아라라트에 당도한 노아의 방주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 일족의 생계 수단


구약성서 『창세기』에 따르면 최초의 와인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노아다. 타락한 인간들을 심판하기 위해 대홍수를 일으키기 전, 하나님은 홀로 바르게 살던 노아에게 먼저 계시를 내린다. 계시를 받은 노아는 거대한 방주를 만들어 자신의 가족과 한 쌍씩의 동물을 태웠고, 이들은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아라라트 산에 당도한다. 비둘기를 통해 물이 말랐음을 확인한 노아와 그 가족은 방주에서 나와 포도농사를 짓는다.


『창세기』 9장에서는 포도주에 취해 그만 실수를 하고 마는 노아의 모습도 묘사된다.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은 그 이야기를 자신의 형과 동생인 셈과 야벳에게 전하는데, 셈과 야벳은 뒷걸음질로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준다. 술이 깬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저주를 내려 셈과 야벳의 종으로 만들었다.


오디세우스에게 와인을 받아 마시는 폴리페모스


최초의 와인, 그 이후


신화와 전설, 성서에는 와인의 탄생 비화 외에도 와인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와인은 오디세우스의 탈출을 돕는 중요한 도구다. 트로이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오디세우스는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동굴에 갇히고 만다. 자신의 부하들을 잡아먹는 폴리페모스를 어떻게 처치할지 고민하던 오디세우스는 올리브나무를 잘라 끝을 날카롭게 다듬고 불에 달구어 둔다. 둘째 날 저녁에도 부하 둘을 게걸스레 먹어치우는 폴리페모스에게 오디세우스는 와인이 든 염소 가죽 부대를 들고 가서 반주를 권한다. 폴리페모스는 술을 거푸 받아 마시고는 결국 곯아떨어지는데, 오디세우스는 이때를 노려 올리브나무를 다시 불에 달군 다음 그의 눈을 찌르고 도망친다.


『마가복음』 14장에서는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포도주를 일컬어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하는 예수의 모습이 묘사된다. 『요한복음』 2장에서 가나의 결혼식에 초대받은 예수는 식장의 포도주가 모두 떨어지자 어머니의 요청으로 물을 와인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한다.


인류 최초의 픽션이라는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는 와인과 지혜의 여신 시두리가 영생을 갈망하는 길가메시에게 죽음은 인간의 조건이니 친구들과 맛있는 술과 음식이나 즐기며 살라고 충고한다.


이처럼 다양한 맥락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해내는 신화와 전설, 성서 속 와인이지만, 이들 이야기는 공통된 메시지를 지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와인은 적당히 마시면 생기를 가져다주는 달콤한 음료라는 것, 그러나 과용하면 망신이나 죽음의 원인이 된다는 것. 인생의 중요한 진리는 역시 동서고금을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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