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런스 게임해보셨나요
몇 달 전 너튜브의 알고리즘에 이끌려 유명 래퍼가 출연한 밸런스 게임 영상을 접했다. 하얀 배경 앞에 놓인 검은색 의자 한 개. 출연자는 의자에 앉아 중앙의 모니터를 보고 주어진 질문에 답을 한다. 단, 선택지는 두 개이며 무조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3초 내에 고르지 못하면 실패. 고작 문제 하나에 얼굴이 빨개지고, 세상 모든 근심을 껴안은 듯 고심하는 태도에 그의 새로운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평소 방송에서 잘 드러나지 않던 진중함이 보였다. 제한된 선택지로 몰아붙인 극한의 상황에서 내리는 결정은 자신의 우선순위와 욕망을 드러나게 한다.
궁금해졌다. 내 친구들의 우선순위와 욕망은 무엇인지. 난 그들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친한 친구일수록 만남에 목적이나 명분을 두지 않는다. 만남을 조성하기 위한 가장 흔한 패턴이라면 "본지도 오래됐는데 밥이나 한 번 먹자." 이 정도랄까. 오래됐다는 기준도 친구에 따라서는 일 년이 될 수도, 한 달이 될 수도, 보름이 될 수도 있다.(내 최단 기록은 보름이다.) 그러나 관계가 두텁다고 해서 꼭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많다. 친하고 편하게 느낄수록 사소한 얘기까지 마음껏 꺼낼 수 있기 때문일까. 시시콜콜한 잡담을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짐가방을 챙길 시간이다.
가끔은 진지한 토크를 이어나가고 싶어 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인생', '꿈', '가치관' 등 고민이 필요한 질문을 무턱대고 던지기엔 분위기를 깰 것 같다. 사랑과 다툼이 넘치는 흥미진진한 가십거리에 나부터 빨려 들어가 정신을 못 차리기도 한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일상만 공유하다 보면 근황 업데이트는 최신인데 속마음은 십 년 전 그대로일 것이라 착각하고 내적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난 OO을 할 거야!" 앞으로의 포부를 밝히는 친구에게 '갑자기?'. '너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놀란 적이 있다면 당신도 한 번 점검해봐야 한다. 그 친구와 지금껏 얼마나 속 깊은 대화를 나눴는지. 내가 아는 친구의 모습이 과거의 형상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닌지.
'밸런스 게임'은 게임이라는 명분으로 그동안 하지 못했던 딥(deep)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괜찮은 방법이다. 마침 이 방법을 써먹을 기회가 찾아왔다. 대상은 한 때 독서토론 모임을 가졌던 대학교 친구들.(지금은 독주(酒) 모임으로 살짝 변질됐다.) 다양한 주제의 책을 함께 읽으며 남들이라면 쉽게 주고받지 못할 문답을 나눈 경험이 있다. 첫 실험 집단으로는 아주 안정적이면서 훌륭한 동지들이다. 날짜는 추석 다음 주, 장소는 코로나 시대 최적의 공간인 친구의 자취방이었다. 이 정도 조건에 게임을 준비해 가지 않으면 평생 안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퍼스널 밸런스 게임'을 기획했다.
일반 밸런스 게임의 질문이 다수를 대상으로 만든 폭넓은 문제라면, 퍼스널 밸런스 게임은 상대방에 관해 어느 정도 알지 못하면 던지지 못하는 사적인 질문으로 구성된다.(퍼스널이라는 말은 '있어 보이려고' 내가 붙였다. 실제로 그런 게 있을 리가.)
일반 밸런스 게임(좌), 퍼스널 밸런스 게임(우) 당신의 선택은?
비교를 위해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일반 밸런스 게임의 조상급 질문을 가져왔다.(난 바다.) 오른쪽은 채식주의자에 술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던졌던 퍼스널 밸런스 게임 질문이다.(난 술? 채식주의자가 아님에도 고민된다. 그때그때 달라질 것 같다.)
한 명 당 다섯 개의 문항을 만들었다. 나는 기획자이면서 출제자, 진행자가 되어야 했다. 그래야 이 게임이 성립한다. 약속 당일, 뭔가를 했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태블릿을 가방에 넣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추석 연휴에 피피티로 내용을 추가하고 지워가며 만든 보람이 있었다. 미리 준비한 밸런스 게임 덕분에 난 30분 간 그들만의 '유재석'이 될 수 있었고, 그들과 더 가까워졌다. 궁금했지만 갑자기 물어보기는 어려웠던 질문들을 마음껏 던질 수 있어서 좋았다. 예상과 다른 답이 선택될 때의 놀라움과 즐거움이란. 갑작스러운 요청에 응해주고, 진지하게 게임에 임해준 친구들에게 고맙다. 나의 첫 게임 기획은 그들 덕분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밸런스 게임의 매력은 모르면 모르는 대로 질문을 던져 상대를 알아갈 수 있고, 알면 알수록 더 고뇌할만한 보기를 던질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언제 해도 재미있다. 미리 질문과 보기를 준비해놓으면 훨씬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놀고 싶으면 그냥 놀면 된다. 다만 좀 더 진득하고 알차게 놀고 싶다면 아이템을 기획해서 놀아보는 걸 추천한다. 예능 프로그램의 기획된 게임이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건 그만큼 '준비'했기 때문 아닐까.
*혹시나 밸런스 게임을 해보고 싶으신 분이 있을까 봐 준비했다. 브런치를 애용하는 작가님과 독자님을 위한 특별 질문이다.
- 좋아하는 것은? (읽기 / 쓰기)
- 글을 읽는데 더 집중이 되는 시간대는? (이른 아침 / 늦은 밤)
- 나는 글을 쓰는 시간대가 (규칙적이다 / 불규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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