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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네오 Nov 06. 2020

난 어떻게 딴손잡이가 됐나

방향이 헷갈리는 나를 위한 변명


좌향좌! 우향우! 뒤로 돌아!


메마른 회색 바닥을 착착 가르는 실내화 합창.

구령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앳된 소년병 같다.

운동장 흙먼지를 흩날리고 있어야 할 체육시간이었지만 그 날은 비가 왔다.

어쩔 수 없이 교실에서 제식 수행평가가 이뤄졌다.


책걸상을 교탁 앞으로 밀어서 급조한 스테이지. 출석번호 순서대로 5명씩 불렸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듯 옆으로 띄엄띄엄 서서 선생님의 지시를 기다린다. 제식은 '차렷', '열중쉬어', '좌향좌', '우향우', '뒤로 돌아' 등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구성됐다. 10점 만점을 기준으로 한 번 실수할 때마다 점수를 차감하는 방식. 평가는 빠르게 이뤄져서 어느새 내 차례가 왔다.


약간의 긴장감을 갖고 무대에 올랐다. "좌향좌! 우향우! 뒤로 돌아!" 연달아 나오는 지시에 5명 전원이 깔끔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그렇게 순조롭게 끝나는 듯했으나 선생님의 마음은 달랐다. 기어이 한두 명의 낙오자를 골라내겠다는 듯 재평가를 실시하겠단다. 이전보다 구령을 빨리해 난이도를 높였다. 그리고 '우향우'가 불렸을 때 나의 약점이 탄로 났다. 모두가 오른쪽으로 돌 때 당당하게 왼쪽으로 도는 나의 용기.


점수가 깎여 아쉽기도 했지만 내 치부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좌우 구별하기. 난 왜 그 간단한 문제가 헷갈릴까? 성인이 돼서야 기가 막힌 변명거리를 찾았다. 무려 20년도 넘은 기억을 헤집어서.




흐릿한 기억 속 한 장면.

난 낮은 책상에 양반다리로 앉아 글씨 연습을 하고 있다. 연필을 잡는 것조차 서툴다. 그저 손을 뻗어 필기구를 쥐고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데 옆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쪽 말고 이 쪽으로 잡고 해야지!" 엄마 말을 따라 연필 잡은 손을 바꿔 쥐었다. '이거 불편한데 이 쪽으로 하기 싫은데.' 투덜대며 오른손을 뻗는다. 역시나 불편하고 힘들다. 왼손이 편해 왼손으로 글씨를 쓰려고 할 때마다 엄마의 외침도 커졌다. 그렇게 난 오른손잡이로 자랐다. 글씨를 쓸 때도, 양치를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오른손만 바쁘게 움직인다.


문득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엄마에게 물었다. 나 원래 왼손잡이인데 엄마가 바꾼 거 아니냐고. 엄마는 긍정도 부정도 안 한 채 미소만 짓는다. 혹시가 확신이 되는 순간이다.

"거 봐! 내가 오른쪽과 왼쪽을 헷갈리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던 거야.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내가 좌우를 헷갈릴 때마다 아직까지 그것도 모르냐면서 무시했던 엄마였기에 억울함을 이렇게 풀곤 한다. 누군가에게 오른쪽은 당연히 오른쪽 일지 몰라도 난 한번 생각을 거쳐야 한다. 밥 먹을 때 쓰는 손이 뭐였더라. '그래 이쪽이 오른쪽!'


엄마의 선행학습으로 오른손잡이가 돼버린 나였으나 타고난 본능이라는 게 정말 무섭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왼손을 자주 쓰고 있었다. 왼손의 주 사용처는 '누군가에게 학습되지 않은 행위를 할 때'이다. 다시 말해 일상생활 대부분의 자연스러운 행동에는 왼손이 주인공이 된다. 설거지를 할 때, 병뚜껑을 돌릴 때,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공 따위를 던질 때 등. 의식하지 않으면 왼손으로 쓰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것들이다. 


나 같은 사람을 '딴손잡이'(혹은 '다른손잡이')라고 부른다. 어떤 일에는 정해진 한쪽 손을 쓰고, 다른 일에는 다른 쪽 손을 쓴다. 양손잡이는 양손을 모두 같은 수준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이므로 차이가 있다. 딴손잡이의 양손은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딴손잡이의 고충이라면 운동이나 스포츠에서 주 사용 손을 결정하는 과정이 까다롭다. 내 경우 배드민턴과 탁구 등 라켓을 사용하는 종목에서는 오른손을 쓰지만, 야구와 농구 등 구기종목에서는 왼손을 활용한다. 물론 이건 온전히 내 판단으로 정했다. 라켓은 손으로 쥐어야 하기에 연필이나 젓가락을 쥐는 오른손이 맞다고 생각했고, 둥근 공을 집거나 던지는 건 그냥 본능을 따르기로 했다. 한 번은 야구 동아리에서 왼손으로 던지는 폼이 이상하다고 지적받아 우투 전향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희소성도 있고 몸도 편하다고 느끼는 좌투를 버릴 수 없었다. 취미로 즐기는 거 내가 좋으면 그만이니까.(사실 지금까지도 어느 쪽 운동능력이 더 뛰어난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둘 다 고만고만해서..)


장점도 있다. 역할은 달라도 양손을 쓰고 있기에 좌뇌와 우뇌를 번갈아 쓸 수 있고(측정해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길래 넣어봤다.), 어느 한쪽 손을 다쳤거나 쓰지 못할 때 다른 손이 커버할 수 있다.(왼손으로 글씨 쓰거나 젓가락질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숟가락질은 가능하다!) 왼팔과 오른팔의 근육량이 비슷하다는 인바디 검사 결과로 보아, 양손잡이만큼 완벽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균형 잡힌 신체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 딴손잡이로 인도해준 우리 엄마. 어릴 적 억지로 오른손을 쓰게끔 해서, 정말 그 이유 때문에 좌우 방향을 헷갈리게 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엄마에게 고맙다. 내가 사회적 소수인 왼손잡이의 불편함을 겪지 않도록 배려한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덕분에 수많은 오른손잡이들과 트러블 없이 식사할 수 있었으며, 깨끗하게 노트필기를 할 수 있었고, 옷의 단추를 잠그고 지퍼를 올리는 행위를 손쉽게 해왔다. 일상의 사소한 행동에도 누군가는 불편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다수가 존재한다는 건 소수도 있다는 얘기니까. 딴손잡이의 진정한 장점은 선천적 한손잡이로서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를 모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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