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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직딩 Dec 16. 2020

남편은 오늘도 야근이란다

나도 늦을 것 같은데... 어쩌지?


“출산 후로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과할 일밖에 없어요. 직장에 다니면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그렇게 잘못인가요?” 육아를 이해해 주지 않는 직장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죄송합니다”라고 양해를 구하며 빨리 퇴근했고, 늦게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가면 보육 교사에게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했다. 외로워서 우는 아이에게도 “엄마가 늦게 와서 미안해”라고 말했다.
<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고바야시 미키


오후 5시 45분, 카톡이 옵니다.

"나 쫌만 야근"


저는 그때 회의실에 있었죠. 언뜻 보니 회의가 금방 끝날 것 같지가 않습니다. 초조해집니다.


"나도 늦을 것 같은데 어쩌지;; 최대한 일찍 퇴근해주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책상 밑에서 카톡을 보내느라 오타 투성이의 메시지를 전송합니다.


둘 중에 한 사람이라도 정시퇴근을 해서 아이에게 가야 하는데 오늘 같은 날은 둘 다 어쩔 수 없이 야근입니다. 웬만해서는 야근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오늘처럼 갑자기 긴급한 회의가 생기고, 논의할 내용이 많은 날엔 야근이 불가피합니다. 아이 보러 가야 한다고 중간에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죠.


몸은 회의실에 있지만 마음은 집에서 날 기다릴 친정엄마와 아이에게로 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될 때 가장 먼저 걱정이 되는 존재는 아이가 아닌 친정 엄마입니다. 아이는 정성껏 돌봐주시는 할머니가 옆에 있을 테니 크게 걱정은 되지 않더군요.


보통 아침 7시 30분에 집을 나서서 집에 돌아오면 오후 7시 30분이 되니, 엄마는 꼬박 12시간을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아이에게 삶의 리듬을 맞추고 계십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아이가 오후만 되면 계속 안아달라고 하는 바람에 10kg이 훌쩍 넘는 아기를 오후 내내 안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죠.


66세 할머니의 리듬과 1세 아이의 리듬은 박자부터가 다른데 말입니다.


엄마가 힘드실까봐 걱정이 되지만 제 몸은 회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 답답할 따름입니다.


친정 아빠에게 SOS를 쳐봅니다. 조금 늦게 연락을 했지만 다행히 바로 퇴근 가능한 상황이었고, 집에 도착하셔서 엄마와 함께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재워주셨네요.


최근 들어 남편은 "나 야근"이라는 메시지를 자주 보냅니다. 요즘 일이 많고 바빠서 다른 직원들 모두 챙겨서 하는 재택근무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죠.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마음을 다 이해하지만, 때론 야속하기도 합니다.


아이를 낳은 후 '야근'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는지, 야근을 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 야근을 줄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야근을 하게 되면 나만큼 이렇게 초조해지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하고요.


하기는 남편이라고 야근을 하고 싶겠습니까? 정시퇴근하고 빨리 집에 와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겠죠. 어느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상황이네요.


저희는 그나마 친정엄마가 전담으로 아이를 돌봐주셔서 다행이지만, 어린이집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나 아이를 돌봐주시는 이모님을 고용한 상황이었다면 어린이집 선생님께도, 이모님께도, 엄마아빠를 기다리는 아이에게도 미안한 상황이 생길 것입니다.


회사에,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미안한 상황이 생기는 것은 기본이고요.


집에 도착해서 잠이 들어버린 아이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엄마 아빠가 있든 없든 할머니와 함께 잘 놀고, 잘 자는 아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네요.


친정엄마께도 늘 감사하지만, 오늘은 죄송한 마음이 조금 더 큽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고, 그 때마다 친정엄마의 전적인 희생으로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겠죠?


그리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또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앞으로도 미안해 할 일들이 수없이 생기겠죠?


미안해 할 상황들을 현명하게 비켜갈 수 있도록

비켜가지 못했다면 지혜롭게 그 순간들을 지나갈 수 있도록

미안한 마음에 움츠려들지 않도록

마음을 붙잡고, 에너지를 관리하면서 엄마라는 이름을 잘 지켜보고자 합니다.


현재시각 11시 20분.

하루종일 육아노동에 에너지를 쏟은 엄마는 일찌감치 잠에 드셨고,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몇 번이나 졸았네요.


열심히 놀면서 크느라 고생한 아이도, 열과 성을 다해 아이를 돌봐주신 할머니도, 딸의 카톡 하나에 열일 제쳐두시고 귀가를 서두른 할아버지도, 각자 처한 환경에서 열심히 직장생활 하고 있는 엄마와 아빠도 푹 쉬면서 회복하는 밤이 되면 좋겠습니다.


굳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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