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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진 Sep 21. 2022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퇴근길의 마음> 을 읽고 든 생각

<퇴근길의 마음>을 읽는 동안 신입시절이 많이 떠올랐다. 대부분 부끄러운 기억들이다.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입사한 홍보대행사에서 주된 일은 기사 아이템을 기획하고 보도자료를 쓰는 일이었다. 당시 나는 기자에게 보도자료를 제공하고 기사 피칭하는 일을 창피한 마음으로 임했던 것 같다. 기업이나 제품의 아주 작은 부분이나 장점을 극대화해 기자에게 어필하는 게 거짓말 같고, "잘 팔고 오라"는 선배의 말을 들을 때면 내가 홍보담당이 아니라 꼭 영업직 같단 생각만 들었던 것. 


그런 마음이었으니 업무 완성도는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을 나만 몰랐다. 그래서 "네 보도자료는 초등학생 일기 같다"는 팀장님 피드백에 반박하고, "이 리드문은 불필요하다"는 말에도 내가 쓴 게 맞다는 태도로 삐딱하게 굴었다. 오히려 내 실력을 제대로 봐주지 않는다며 억울해 했던 것 같기도. (지금 생각하면 꽤나 건방졌...)


빨간펜 첨삭해준 팀장님께 대들다가 사수 선배까지 호출돼 회의실에서 같이 혼나고, 팀장님과 1:1 면담 했던 때의 나는 꼭 관심사병 같았다. 그래도 팀 막내니까 선배들은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며 달랬던 것 같고. 물론 그런 노력이 언제까지나 유효할 리는 없었다. 후배가 들어온 것이다. 


후배는 나와 전혀 다른 캐릭터였다. 팀장님이 혼내면 누구보다도 빠르게 잘못을 인정했다. 때로 "제가 정말 미쳤나봐요, 정신머리가 이래서야"라며 과장된 몸짓으로 자책하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는데 그쯤되면 도리어 팀장님과 선배들이 그럴 것까지 없다고 후배를 말렸다.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도록 만들 줄 알던 후배는 꼭 인생 2회차 신입 같았고 나는 곧 후배에게 말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일에 잘못이 있을 때는 빨리 인정해야 한다. 더불어 가능하면 잘못된 일은 빨리 발견될 수 있도록 방법을 마련하면 좋다. 팀원의 실수는 팀의 실수이기도 한데, 문제가 커질까 무서워서 실수를 덮고 있다가 큰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든 일을 마친 뒤 확인하는 과정에서든 문제가 있을 때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환경이 우선이다. 

_<퇴근길의 마음> 중에서


어느 날 모 전자기기 미술대회 행사가 주말에 있으니 시간 비워두라는 팀장님 지시가 있었다. 그때부터 좌불안석이었는데 그날은 내가 언론반 사람들과 연탄봉사 가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같은 날 연탄봉사 행사를 제가 준비한 거라 업무 행사는 갈 수 없다고 말씀 드렸다. 그때 팀장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건 행사 지원은 후배가 갔고, 그날 이후 내가 해야 할 (것 같은) 업무에 후배가 배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거의 매번 갈아엎는 수준으로 달라지는 인터뷰 자료 최종본을 보며 좌절했으나) 가장 흥미를 느꼈던 셀럽 인터뷰 건에도 후배가 인볼브됐고 같이 초안을 쓰기 시작했다. 주말에 초안 쓰러 회사를 나가면 언제나 후배가 먼저 와 있었다. 먼저 왔으니 먼저 끝내고 먼저 피드백 받는 게 당연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먼저 컨펌 받는 후배에게 질투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팀장님과 동행하는 일이 많아지는 후배에게 질투하고, 나보다 나이 어린데 멘탈은 훨씬 강해보이는 후배에게 질투하면서 스스로를 좀 먹게 하던 시절... 그때 나는 건방지기도 하고 되바라지기도 하고 능력은 안되면서 욕심과 질투는 가득하던 못난이였던 게 분명하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질투는 상처가 되지 않을 수 있고, 나 역시 성장할 수 있다. 질투하는 마음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비교하는 마음에서 생겨나는데, 비교하지 않는다면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나아지기 어렵다. 하지만 질투하는 마음에 사로잡히면 타인의 장점을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깎아내리려는 비겁한 마음으로 가득해진다. 

_<퇴근길의 마음> 중에서


타인이 가진 자질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깎아내리고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던 시절. 건강하게 부러워하면서 '질투'를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연료로 썼더라면 시간 낭비를 덜하지 않았을까. "내가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면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내 문제일 뿐"이라 생각하며 "내일의 나를 오늘의 내가 만나면 질투할 만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했다면 말이다. 



기준을 어제의 나와 오늘에 나에 두는 건 더 간단하다.
삶에서 욕심내는 것이 많을 때 우리의 시야는 좁아지곤 한다.
타인의 삶에 대해서라면, 그가 말로 다 하지 않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고충이 있다고 생각하면 질투가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나는 내가 가지 않은 길을 씩씩하게 가는 모든 사람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본다. 동시에 그가 말하지 않은 어려움을 내가 모른다는 이유로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때로는 내가 질투하는 대상을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성장하기도 한다. 
지금의 내가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면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의 내 문제일 뿐이므로,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타인의 문제는 아니다. 
질투는 안전지대에 고여있으려는 내 욕망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내가 '되고' 싶은 자질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고, 존경하고, 나 자신을 바꾸고자 노력한다. 노력해도 정신차려 보면 제자리로 돌아와 있곤 하지만, 시도하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는 조금씩 변화를 겪는다. 내일의 나를 오늘의 내가 만나면 질투할 만한 인간이었으면 한다.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고, 차근차근 일하며, 새로운 관계에도 도전에도 적극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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