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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진 Sep 22. 2022

무지를 인정할 줄 아는 어떤 판사의 자기고백

<어떤 양형 이유> 리뷰

<어떤 양형 이유>는 판사로서, 한 개인으로서 오랜 고뇌를 꾹꾹 눌러담은 자기고백 성찰 에세이다. 


책을 읽으며 여러 번 놀라게 되는데 일단 판결문을 읽으며 놀란다. 판결문은 늘 딱딱하고 어렵고 주어와 술어가 어디로 연결되는지 헷갈릴 만큼 긴 문장으로 쓰여지는 줄 알았던 기존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알려주니까. 그리고 판사의 수려한 필력에도 놀란다. 판사가 이렇게 아는 것도 많고 글도 잘 쓰면 어쩌라는 것인가 싶게 잘 쓴다. 


아이들이 가장 예쁠 때가 항상 지금이듯, 사랑이 가장 필요한 때도 바로 지금이다. 지나간 사랑의 관성으로만 나아가는 가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사랑이 소중한 것은 그 자체로 숭고하고 고결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랑은 실용적이어서 중요하다. 사랑은 무관심과 질시와 모욕과 폭력을 없애는 백신이나 해독제 같은 것이다. 증오가 왱왱거리며 삶을 위태롭게 할 때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하지만, 그들 사랑은 이미 바닥나버렸다. 사랑은 폭력으로 대체되었다. 폭력만이 무너진 가장의 위신을 세우고 가정의 질서를 유지한다고 믿는 아버지는 밥상을 뒤엎다가 급기야 망치를 들어 아내와 딸을 때리고 칼로 그들의 얼굴을 그었다. (...) 법정은 모든 아름다운 구축물을 해체하는 곳이다. 사랑은 맨 먼저 해체되고 결국 가정도 해체된다. 

_<어떤 양형 이유> 중에서


잘쓴 글이고 잘 읽히는데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는 건 한 문장 한 문장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아서다. 가정폭력과 성적 자기결정권 문제를 시작으로 성소수자의 삶, 산재사고, 소년사범, 마약사범 등의 문제를 전방위적으로 다루는데 읽기 힘든 부분도 여럿 등장하기 때문에 소화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2019년의 사건사고가 2022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동일한 형태로 혹은 법의 맹점을 잘 이용하여 더 교묘해진 형태로 진화, 반복된다는 사실에 또한 놀라며 읽게 된다. 절망적이기도 한 부분이다. 


위험을 외주화하고 하루 평균 노동자 다섯 명이 사망하는 나라, 하루 평균 노동자 다섯 명이 사망해도 원청업체의 이윤이 늘기만 하면 죽음도 기꺼이 용인하는 나라, 하루 평균 노동자 다섯 명의 죽음을 용인하며 이윤만을 추구하는 연 매출 수조 원의 대기업에 가해지는 형벌이 고작 벌금 1,000만 원이 전부인 이 나라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옴에 가장 적확한 단어는 퇴근이나 귀가일 수 없다. 생환이다. 타인의 희생 위에 축조된 삶이 과연 행복할까. 위험을 외주화할 수 있다. 죽음도 하도급 줄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은 하청 줄 수 없다. 

_<어떤 양형 이유> 중에서


독서모임에서도 여러 명이 언급했듯, 소년사범 이야기를 읽을 당시는 '소년심팍' 드라마가 자연스레 연상되며 촉법소년에 대한 개인적 입장을 분명히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처벌받지 않는 나이라는 것을 알고 악용하여 각종 중범죄를 일으키는 소년들을 처벌하기 위해 소년법을 폐지하는 것이 과연 맞을까. 저자 역시 판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데 상당 부분 할애했던 것 같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한 마을이 필요하듯,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인용에서 느껴지듯 단순히 개인만의 책임으로 모든 것을 전가할 수 없음을, "탐욕에 탐욕으로 맞서는 방법"이 능사는 아님을 주장하며 단순 처벌보다는 예방을 위한 더 큰 차원의 연대, 사랑, 관심, 책임을 강조하는데 그 기저에 '인간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백프로 동의하진 않지만 이런 판사도 있다는데 놀라면서. 


소년들의 강력사건이 발생하면 어김없이 소년범을 엄벌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 말이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아이들의 육체적·정신적 성숙이 점점 빨라지는 상황에서 괴물 같은 아이들이 저지르는 강력사건에 적절히 대처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그 몇몇 아이 때문에 나머지 아이들에 대한 처벌이 덩달아 엄해지고, 그나마 턱없이 부족한 사회적 관심과 배려가 줄어들까 무척 염려된다. 

_<어떤 양형 이유> 중에서


"위험을 외주화할 수 있다. 죽음도 하도급 줄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은 하청 줄 수 없다"는 말, "혐오는 대부분 관념에 정주한다"는 말, "시선만 바꾸면 전경과 배경이 서로 뒤바뀐다는 사실"과 "우리는 서로의 배경이면서 전경"이라는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혐오는 대부분 관념에 정주한다. 혐오의 대상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 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보면 혐오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편견에 근거한 것인지 금방 깨닫게 된다. 

_<어떤 양형 이유> 중에서


무엇보다 좋은 판사의 덕목으로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언급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엘리트주의, 기득권주의, 특권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인정하는 판사가 물론 있겠지만 쉽지 않은 것일 테니. 


지난 독서 모임 때는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들었는데 미국처럼 징벌적 손해배상을 할 수 있는 게 좋은 것처럼 포장되지만 실제 패소율을 따져봐야 할 것이라는 ㅈㅇ의 말과 오히려 하한선이 높아져야 한다는 말도 기억에 남았고 


1심 벌금형에 불복해 항고하면 1심보다 더 많은 액수를 집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2심까지 끌고 가는 사람과 1심을 받아들이고 벌금을 내는 사람 중 누가 더 양심적인가에 대한 질문도 그간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안이라 기억에 남았다. 


사제가 되고 싶다는 목표는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사제가 되지 못했다는 패배감은 아니었다. 꿈을 좇아 힘들게 도착한 곳이 상상과 너무 다르다는 당혹감, 목표를 상실한 공허함을 느꼈던 것 같다. 한때 내가 머문 모든 곳은 변방이고 변두리였다. 한때 내가 마음 준 모든 것 역시 외롭고 소외된 허접한 것들이었다. 나는 세상의 중심에 서고자 이를 악물었다. 배경이 아니라 전경으로 살고 싶었던 나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드디어 중심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를 중심으로 한 모든 것과 내 배경은 각자 스스로의 중심을 찾아 떠나버린 뒤였다. 나는 속절없이 혼자 남겨졌다. 나는 동그마니 홀로 사막 위에 선 한 그루 나무였다. 내가 중심으로 살지 못한 것은 내가 소외되고 외진 곳에 서 있다는 그 마음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시선만 바꾸면, 전경과 배경은 서로 뒤바뀐다는 사실이 그제야 보였다. 나는 당신의 배경이고, 당신은 나의 배경이다. 우리는 서로의 배경이면서 전경이다. 

_<어떤 양형 이유> 중에서

치료사법 절차는 전통적 사법절차와 달리, 분쟁의 사후적 해결보다는 문제해결을 통한 분쟁 예방을 목적으로 하고, 당사자주의적 경쟁절차보다는 협동적 절차를 중요시하며, 사건보다는 사람을 지향하고, 소송보다는 소송 이후와 대체적 분쟁 해결을 핵심 절차로 여기며, 심판자보다는 코치로서의 판사 역할을 강조하는 등의 특징이 있다. 

_<어떤 양형 이유> 중에서
정의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더불어 정의감을 예민하게 벼려야 한다. 적법과 불법, 악과 선, 해선 안 될 일과 해도 되는 일,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에 대한 감각을 끊임없이 갈고닦아야 한다. 그렇게 예민하게 벼려진 더듬이를 세상에 드리우고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둔감해지고 게을러지면 끝이다. 부탁받은 정의가 보관된 창고를 수시로 열어보고 환기시키지 않으면, 정의는 부패하고 기화해버릴 것이다. 

_<어떤 양형 이유> 중에서
좋은 판사의 덕목으로 여러 가지가 꼽히지만, 그중에서도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판사들이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소송관계인 중 판사가 가장 무지하다. 모르려면 차라리 완벽하게 몰라야 한다. 

내 무지가 잘못된 판단의 면죄부가 될 수 없지만,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사실만은 잊지 않으려 한다. 그래야만 당사자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그의 입장에 서보려는 자세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_<어떤 양형 이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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