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터렐과 옌스 하닝
OTT플팻폼의 후발주자 디즈니플러스가 넷플릭스와 맞짱 뜰 수 있게 만들었던 드라마가 있었는데, 최민식 배우가 출연한 <카지노>다. 탁월한 임기응변과 근성으로 필리핀 카지노의 제왕이 되며 승승장구하던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인생스토리를 담은 작품이다. 우연한 기회에 초반 몇 편을 보게 되었는데, 주인공 차무식의 사업수완이 놀라웠다. 진심과 가식, 진실과 거짓 사이를 재빠르게 오가며 사람을 홀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니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사업수완에 찬사를 보냈다.
사업수완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더 있다. 어릴 적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의 주인공 봉이 김선달이다. 어느 날 대동강변에 나가 보니 그곳에 물을 길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극히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었지만 김선달의 머리 위엔 반짝하고 전구가 켜졌다. 김선달은 물을 퍼담는 그들에게 돈을 한 푼씩 주며 다음날 다시 돌려 달라고 부탁한다. 다음날이 되어 돈을 받은 사람들이 다시 김선달에게 돈을 돌려주고 있는데 마침 그 모습을 본 외지인이 궁금해하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김선달은 대동강 물을 팔고 있다고 말하며 혹시 물을 팔 권리를 사겠냐고 묻는다. 이문이 어마어마한 장사라는 말을 무심히 던지며. 아무리 퍼내도 줄어들 것 같지 않은 대동강물을 생각하니 욕심이 생긴 외지인. 김선달에게 많은 돈을 주고 대동강 물의 판매권을 사고 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속은 걸 알고 얼마나 분통 터졌을까.
어릴 적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땐 욕심에 눈이 먼 외지인이 한심하게 느껴졌다면 지금은 오히려 김선달의 사업수완이 놀랍기만 하다. 사기를 사업수완이라고 포장해 표현했지만 말이다.
민담의 주인공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았다면, 미술계엔 하늘을 작품이라고 하며 돈을 버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그를 김선달과 같은 사기꾼으로 여기는 건가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내가 존경하는 예술가 제임스 터렐의 이야기다.
원주의 오크밸리 내부에 있는 미술관 '뮤지엄 산'은 이름처럼 산속에 있어 계절마다 다양한 풍경을 느끼는 묘미가 있는 곳이다. 한솔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뮤지엄 산'은 국내 최대의 정원형 뮤지엄으로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건축을 총괄했다. 3개 공원과 뮤지엄 본관, 제임스 터렐관 이렇게 2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진 뮤지엄 산은 배우 공유의 커피 CF의 배경인 커피숍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은 총 5개다. 그중 <간츠펠트(완전한 영역)>는 시시각각 변하는 색의 빛으로 가득 찬 공간, 그 속에서 순간과 영원, 현실과 가상이 맞닿아 있는 극한의 몰입을 경험할 수 있다. 원주 여행을 계획한 지인들에겐 꼭 한 번쯤은 경험해 보기를 추천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하늘을 작품으로 사용하는 <스카이 스페이스>. 스무 명 남짓한 인원이 들어갈 만한 원형의 공간엔 내부의 벽을 따라 벤치가 둘러져있고, 그곳에 앉아 위를 올려다보면 작품을 관람할 준비 완료다. 천장은 타원형 모양으로 뚫려있고 그 공간을 통해 하늘이 보인다. 앉아있는 위치에 따라 그 구멍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 구멍은 어느새 둥그런 액자가 되고 그 속에 담긴 하늘은 곧 그림이 된다. 그 그림은 계절과 시간, 날씨와 온도에 따라 색과 모양이 수시로 달라지는데 심지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모두 다른 모습의 그림을 감상하게 된다. 19세기 인상주의자들에게 빛은 새로운 미술의 모멘텀이 되어준 귀한 요소였다면 터렐의 작품 속 빛은 깨달음, 초월, 에너지, 치유의 메타포로 사용된다. <스카이 스페이스>는 하늘을 향해 열려있는 공간으로 들어오는 빛이 작품이고 미니멀한 건축물은 액자가 되고, 하늘은 거대한 작업실이 된다. 빛은 공간과 공명하며 익숙하지만 낯선 시선으로 그것들을 관조하게 만든다. 이상하리만치 차분해지며 거대한 공간으로 유영하는 상상 속의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 모든 과정에 내 나름대로의 이름을 붙였다. 자유 혹은 치유.
김선달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터렐의 작품은 김선달의 수완과는 대척점에 있는 듯싶다. 이번엔 김선달의 수완 쪽에 가까운 이야기다. 2021년 덴마크 쿤스텐 현대미술관은 <Work it out>이라는 전시를 기획하며 기존에 노동을 주제로 작업을 해왔던 옌스 하닝에게 작품을 의뢰한다. 옌스 하닝은 나라별 평균소득을 다룬 작품들을 만들어왔는데, 실제 지폐를 평균소득금액만큼 캔버스 위에 붙이는 형태였다. 미술관측은 그의 과거 작품과 동일한 형태로 덴마크와 오스트리아의 평균 임금을 작품으로 표현해 달라고 요청한다. 양국 간의 임금 수준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소득의 격차와 노동의 대가에 대한 중요성을 언급하려는 의도였다. 예술가에게 지급하는 작품 제작비 외에 그 작품에 부착할 돈 약 1억 원을 지급한다. 당연히 전시가 끝나고 나면 작품에 사용된 돈은 미술관으로 되돌려 준다는 계약서도 작성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하닝은 두 개의 작품을 미술관에 보낸다. 그러나 미술관이 받은 캔버스는 무언가가 붙었다 떨어진 것과 같은 자국들만이 남아있는 텅 빈 캔버스였다.
제목은 <돈을 갖고 튀어라>. 미술관측은 당황했지만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던 인사이트가 있을 법 한 작품이라는 명분하에 그 빈 캔버스를 예정대로 전시한다. 미술관이 준 돈을 먹튀 한 예술가의 이야기가 언론에 오르내고 미술관측은 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절도에 관한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했지만 하닝은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돈을 가져간 것 그 자체가 작품이다. 절도가 아닌 계약위반이며, 계약 위반은 작품의 일부다." 그리고 "미술관이 계획한 것보다 더 나은 작품을 만들었으니 문제 될 게 없다"라고 말한다. 미술관과 하닝의 분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게 하는 이메일이 하나 발견되는데 하닝이 미술관에 보낸 것이었다.
"당신들이 의뢰한 작품과는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 것이다. 돈은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들은 그저 속은 척 행동해 주면 된다."
미술관측은 노이즈 마케팅으로 괜찮은 가십거리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미 계약서엔 전시 종료 후 현금은 돌려받는다는 조항이 있었기에 이 작전에 순순히 응한다. 그러나 미술관측의 기대와는 달리 하닝은 '계약 위반'이 자신의 작품이 라며 돈을 돌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미술관은 민사소송을 제기, 사건 발생 2년 만에 하닝은 패소하게 된다. 미술관에서 전시한 5개월 간의 비용을 제외한 금액을 배상해야 했다. 아! 이 전시는 성공적으로 흥행했다. 그리고 여전히 하닝의 작품은 쿤스텐 미술관에 전시 중이다.
하닝의 사건은 예술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사기인가? 아니면 예술가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 우매한 사람들의 지나친 결정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예술은 질문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