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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라즈 Feb 10. 2021

잘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쓰레기, 물건, 기억과 삶


요즘 제로 웨이스트 실천을 하는데, 꽤나 노력을 하는데도 매일 생기는 불가피한 생활 쓰레기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이 쓰레기는 과연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사라질까? 비닐 종류는 정말 몇 백 년 후에도 남아있어서, 미래의 다른 문명이 현 문명의 쓰레기를 주워다가 사료로 삼아 역사를 복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한다. 


베란다에서 퇴비를 만들고 관리하다 보면 사라지는 것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된다. 공기가 잘 통하는 것이 중요해서 버리러 나갈 때마다 기존의 퇴비를 섞어주는 동안 얼마나 퇴비화가 되었는지 확인을 해보면, 어떤 음식 잔여물은 금방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반면 줄기가 굵은 것이나 단단한 것은 꽤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있다. 심지어 모든 음식물이 썩고 남아 흙으로 돌아간 자리에, 과일에 붙어 있었던 스티커만 덩그러니 남아있어서 황급히 치운 적도 있다. (원래 버리기 전에 확인했어야 했는데 과일 껍데기에 붙어 있어서 모르고 버렸던 것들이다.) 그걸 보면서 자연에서 난 것은 자연으로 금방 돌아가지만 사람이 만든 것은 모든 게 사라진 후에도 덩그러니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나는 퇴비화가 된 흙을 다시 식물을 키우는 데 비료로 쓰기 때문에 사라진 것들이 흙 속에 남아 새로운 싹을 틔우게 된다고 생각한다. 


물건 하나를 버릴 때도 재활용이 되는지, 처리 방법이 있는지 고민하게 되다 보니 소비를 할 때도 이 물건이 얼마나 잘 사라질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물건의 재질을 따지는 일이 많아진다. 되도록 종이로 만들어진 것, 생분해가 되는 것, 나무나 인공적이지 않은 것들을 최대한 구매하려 한다. 유리나 스테인리스 재질은 재활용이 잘 되는 것뿐이지 그냥 버리게 되면 자연에 꽤 오래 남아있기 때문이다. 실리콘 역시 잘 썩지 않는 재질이라서, 재사용이 잘 되긴 하지만 나는 되도록 구매하지 않으려 한다. 아무래도 물건이 제 역할을 다 하고 버려진 후에는 완전히 잘 사라졌으면 좋겠다. 


동시에 유학생활의 불안정성과 겸해서 미니멀리즘도 추구하느라 짐도 자주 비우는 편인데, 가끔은 한창 즐겁게 사용했다가 생활 습관이 변하거나 용도를 다해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된 물건을 버릴 때마다 생각이 많아진다. 버려지는 물건과 함께 나의 삶의 한 부분이 끝났다는 걸 느끼곤 한다. 더 이상 맞지 않은 옷, 유행에 뒤쳐진 옷, 성능을 다 한 전자기기를 버릴 때면, 물건뿐만 아니라 그걸 사용하던 나의 습관이나 기억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추억에 대한 미련 때문에 물건을 남겨두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사람의 집이 좁아 많은 물건을 두기 어려운 것처럼, 사람의 기억 또한 한계가 있어 오래 지나간 일은 서서히 잊혀야만 하기 때문이다. 기존 물건을 버려야 새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추억도 바래져야 또 새로운 생각과 경험을 담을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살 수 없으니까. 한때는 즐겁고 소중했던 추억도 기억의 저편에서


결국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유학생활과 자취를 하다 보니 이동이 잦아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예전에 친했던 친구들이었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전만큼 자주 만날 수 없게 된다. 대신 나는 지금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있다. 지금 만나는 친구들도 나중에 내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면 또 멀어지게 될 것이다. 물론 나중엔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이어갈 테지만, 삶의 한 철은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다. 내가 알았던, 그리고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예전이나 지금과 다름없이 항상 만날 수는 없다. 내 시간과 몸과 마음에는 모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떠나가거나 멀어진 인연은 때론 추억으로만 남겨야만 하고, 그 기억조차 적당한 시일이 되면 보내주어야 한다. 나는 모두 다 가지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 자신은 잘 사라질 수 있을까. 아직 죽음에 대해 생각하긴 이른 시기이지만, 노후 준비를 시작하는 나이이기 때문에 평균 수명이라든가 대략적인 노후 계획을 생각해보면 막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저런 재테크 강의를 보다 보니, 은퇴 후 30년을 놀기 위해 현재에 버는 돈의 반을 저축한다거나 투자에 온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에는 잔잔한 회의감이 들었다. 은퇴 후에 30년이나 더 살지 않으면 그렇게 모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은퇴 후에 1-2년만 건강하게 보내고, 그 후에 편안한 죽음이 보장된다면 현재를 그렇게까지 희생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물론 은퇴 후에 오래 살지 않게 되더라도 큰 질병에 걸리면 치료비도 필요하고, 살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어느 정도 저축은 해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 후 30년이라는 말은 너무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문제는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평균 수명은 늘어만 가고 있으니 나도 아마 내가 원치 않을 때까지 오래 살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빨리 죽으면 된다고 결론 내릴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삶은 소중한 것이니까. 삶이 소중하기에 더 삶과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노인 인구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나 개인의 삶을 돌아봤을 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므로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나는 사회적으로 노인 인권과 노후 대책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강하게 오래 살며 삶을 즐기면 좋겠지만, 움직이기 힘든 몸으로 생을 버텨가기만 하는 삶이 오래 이어지는 것은 그다지 행복할 것 같진 않다. 게다가 은퇴 후를 준비하기 위해 젊어서부터 힘들게 돈을 모아야만 한다는 것도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결국 사람도 제때 잘 사라져야 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회의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제한된 시간 속에서 더 가치 있을지도 모른다. 은퇴 후를 위해 현재를 지나치게 희생하고 싶진 않다. 지금의 삶에 더 충실하고, 은퇴 후의 기약 없는 여유로운 삶을 위해 달려가기보다는, 적당한 한계점을 정한 후에 나머지는 지금 당장의 삶을 즐기는 것에 집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퇴비더미에 야채 찌꺼기를 버리면서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흙으로 돌아가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 있기를. 내가 은퇴할 무렵이면 안락사가 허용되어나 해서, 부디 내가 삶을 잘 마무리하고 세상에 너무 많은 것을 남기지 않고 잘 사라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 내가 또 잘 사라져야 다음 사람이 자리를 잡을 것이고 내 몸이 흙으로 돌아가 또 세상의 일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결론은 논문 읽기 싫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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