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업국가의 종말
19세기의 아시아는 서구 유럽의 문화적 계몽주의의 탈을 쓴 선진 제국주의 국가의 야망과 이들을 배척하려는 국가 간의 한판 싸움으로 오늘날의 한반도만큼이나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런 나라들 중에서 19세기의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대대로 칼 쓰는 나라 사무라이 국가 일본은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나라인 만큼 칼 잘 쓰는 것이 덕목이었다 공부 같은 것은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어쩌다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사무라이들이 무섭게 공부하기 시작했고 서양의 발달된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무라이들의 땅에 떨어진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임을 깨닫게 됐다. 그때 정신 차린 조상들의 앞선 근대화 성공의 업에 힘입어 그 후손들은 지금 세계 3위(미국 중국 다음) 선진 경제 대국이 되어 떵떵거리며 우리에게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1904년의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박박 우기고 있다.
임진왜란 때 정명가도(征明假道-명나라를 정복하려고 하니 길 좀 내달라)나 조선정벌을 목표로 한 정한론(征韓論-조선을 먹어 버리자)이나 제국주의 국가 확립을 위해 만주사변이며 중일전쟁 심지어는 1,2차 대전까지 일으켰던 때의 혼내(일본어 本音-본심, 본마음)을 다시 한번 실현하고자 대동아 공영 권을 주장하며 아시아의 맹주가 되려 했던 음흉한 마음이 일본인들의 가슴에 태생적으로 있음을 요즈음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조짐이 여러 군데 보이기 시작하지만 오늘 우리의 정치는 그 시절 그때처럼 또 정쟁만 하고 있지 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는 철천지원수 같은 인간이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영웅과 같은 인물이 두 명이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안중근에 의하여 저격을 당한 대한제국 1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이다.
천민 출신으로 100년 동안의 지긋지긋한 전쟁으로 점철된 춘추전국시대를 통일로 이끌어 오늘의 일본을 이룩하는 기틀을 만들어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인들의 마음속에는 천민도 한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되고 더 나아가서 그 꿈을 중국 대륙까지 집어삼키어 아시아의 맹주가 되고자 했던 그의 용맹과 기개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언젠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시아 맹주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후손들이 지금은 왜 없겠는가?
정명가도를 얘기한 것을 보면 애초부터 조선이라는 나라는 일본에게는 임진왜란이나 정한론을 주장하면서 중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그냥 거쳐가는 사소한 길 내기 정도밖에 안 되는 하찮은 나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Main Dish(주 요리)를 먹기 전의 Appetizer(전채요리) 정도?
이토 히로부미도 아버지가 조슈 번의(삿초 동맹의 한 축) 농민 출신 하급 사무라이 가정에 양자로 들어가 겨우 하급 사무라이가 된 농민 집안 출신이다.
야망과 욕망에 가득 찬 이토 히로부미 도 조슈 번의(메이지 유신 핵심) 무기 구입 등의 업무를 하면서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고 후에 조슈 번의 5 걸이 된 다섯 동지들과 영국 대학에 유학을 가게 되고 더 나아가 미국 예일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도 수여받았으며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는데 서양 유학 동지들과 함께 지대한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총리를 4번이나 하고 심지어는 전공하지도 않은 일본제국헌법도 만들었다.
또 한 명의 메이지 유신 성공 1등 공신인 사카모토 료마도 하위 사무라이 출신으로서 삿초 동맹(사 쓰마 번과 조슈 번간의 동맹)을 이끌어 내고 메이지 유신 개혁의 기반이 된 선중 8 책 등을 만들어 냈다. 우리가 잘 아는 손정희 회장이 가장 존경한다는 사람이다.
일본인들에게는 이와 같이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경험과 전통을 복원시키고 싶은 강한 잠재의식이 꿈틀거리고 있다.
결국 오늘날의 일본은 이런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있었고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을 내치지 않는 환경 여건이 잘 숙성된 점도 있었다. 사실에도 막부 말기의 쇼군 들은 나태하고 무능해서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했으며 국민들은 이때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깨어있는 사람들을 적극 응원해주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조선은 초딩 왕에 대원군, 명성황후, 고종 같은 꽉 막히고 무능한 권력과 관료들의 쌈질로 근대화는 시늉만 내다가 실패로 끝났다고 하더라도 세계의 중심이고 (中華思想) 아시아의 맹주라고 자처하던 청나라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청나라도 일본의 변화를 보면서 양무운동(洋務運動: 서양의 무기를 받아들이자는 운동. 청일전쟁의 패배로 실패) 변법자강 운동(變法自强運動: 입헌군주제, 군부 개혁, 제도 개혁 등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배우자는 운동) 같은 형식상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운동을 벌이기는 하였지만 집권세력의 욕심 때문에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것을 내려놓으면 자신들의 권력이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핵심적인 의회정치나 군부 개혁과 더불어 전 분야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지 않는 바람에 모두가 근대화에 실패하였다.
변법자강 운동은 조선의 갑신정변과 거의 비슷하다. 갑신정변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법치국가 건설과 군사력 증대 제도개혁을 통해 청나라에 의존하는 수구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개혁 국가를 만들기 위하여 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두 나라 모두 개혁운동이 실패하게 된 주역이 바로 두 여인 때문이다. 청나라는 서태후고 조선은 명성황후다.
한국 관광객이 중국 베이징을 가게 되면 반듯이 가는 곳이 이화원이라는 곳이 있다. 이 이화원이 바로 서태후의 별장이다. 서태후는 이 별장을 짓기 위해 없는 예산을 빼돌리는 바람에(심지어는 국방예산까지) 돈이 없는 청나라 군대는 무기 제작과 군수물자 비축을 하지 못해 청일 전쟁이 일어났을 때 무기의 숫자도 부족하고 정비도 제대로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대포를 쏘려 해도 탄알이 없어 쏘지 못하는 한심한 일이 일어나 일본과의 전쟁에서 처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서태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당시의 무능한 황제(광시 제)가 변법자강 운동을 통해 개혁을 시도하려는 의도를 간파한 서태후가 광시 제를 잡아가 두는 바람에 100일 천하로 끝났고 갑신정변도 명성황후가 청나라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명성황후는 남의 나라 힘을 빌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선수였다.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 갑신정변 등 일이 있을 때마다 청나라의 도움을 요청해서 일을 해결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조선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니 라고 아무 일도 못했다.
만일 서태후가 일본의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이고 군을 개혁하기로 했던 변법자강 운동을 받아들였다면 오늘날 중국은 어쩌면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일본이나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 국가가 되었을는지도 모르고 아마도 한국의 6.25도 없지 않았을까? 서태후 하나 때문에 세계질서가 바뀌었다.
이때부터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 초딩의 나라 조선은 엄청난 국력과 경제력의 격차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이때 이미 조선이 일본의 먹이가 될 징조가 시작된 것이다.
명성황후도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려고 하였지만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는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문호 개방을 하려 하였다. 점진적으로 개혁하겠다는 뜻은 상황을 봐가며 하겠다는 뜻이니 개혁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위정척사파(청나라 이외의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나 급진 개혁파들과 싸움만 하다가 근대화는 실패하고 결국 나라를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중화라는 말마따나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땅덩어리도 제일 크고 문화나 지식뿐만이 아니라 힘도 제일 세다고 믿고 살았다.
그러니 조선은 외국을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고작 밖으로 나가봐야 늘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만 부지런히 다녔다.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조그만 섬나라 영국에 박살 나도록 두들겨 맞는 것을 본 일본은 위기의식과 함께 점점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대패한 사실을 조선은 청나라를 통해서 들었으니 아마도 청나라는 우리 조선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아 그 유럽의 조그마한 섬나라 영국 애들이 와서 수교하자고 치근치근 대는 것을 안 들어줬더니 소란을 피워서 우리가 그냥 불쌍해서 그러자고 하고 선물도 조금 주고(홍콩을 100년 동안 빼앗김) 달랬으니 별것도 아니고 조선은 걱정할 필요도 없고 신경 쓰지 마”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진 사실을 청나라를 통해서 들은 것이 아니고 일본에 와있던 네덜란드 인이나 영국 등 외국인 들을 통해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중국이 생각보다 별 것 아니구나 라는 의심을 이때부터 갖은 일본은 철저한 준비와
계략을 꾸며 결국 조선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남의 나라 조선에서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조선에 와있던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는 청일 전쟁을 일으켜(1894) 청나라를 박살내고 여세를 몰아 10년 뒤에 러일전쟁에서(1904) 러시아까지 깨부순다.
상식적으로 청일전쟁이라면 청나라나 아니면 일본에서 전쟁을 하여야 되는 일인데 한심한 조선의 왕과 대신들은 우리나라에서 싸움하도록 운동장을 내주고 전쟁 구경을 하면서 앞으로 어느 나라에 달라붙으면 좋을까 축구선수 선발하듯 관람을 하고 앉아 있었으니 창피해서 어디다 말도 못 할 일이 이 나라에서 벌어졌다.
정조가 죽은 1800년경에 만일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같은 서구 유럽에 시찰단을 보내는 왕이 있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네덜란드의 하멜은 일본을 가려다(1653)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조선에 잡혀와 조선에 살다가 탈출해서 하멜 표류기라는 책을 썼다. 굴러들어 온 떡도 발로 찾다.
메이지 유신의 기폭제가 되었던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던 시기보다(1853) 정확히 200년 전의 일이다.
이미 일본에는 이때 네덜란드 인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사무라이 출신 다이묘(大名)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칼 대신 들고 온 조총도 포르투갈 사람이 전해준 것이다.
이때 우리 왕이 일본의 사무라이 쇼군 도꾸가와 이에야스만큼만 똑똑했으면 외국의 학문과 문화에 호기심이라도 품었을 터인데 만날 성리학, 주자학이 어떻고 저쩌고 하며 이기론이니 4단 7 정이니 똑똑한척하던 학자들이 칼 쓰는 무사의 발 뒤꿈치도 못 따라갔으니 한심한 일이다. 심지어는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던 봉림대군 효종과 그의 부인이 죽자 계모이고 시부모이기도 한 자의대비가 상복을 1년 입어 야하느니 3년을 입어야 하느니 하며 말 도 안 되는 일을 가지고 성리학의 대가라는 학자들이(송시열 등) 싸움질이나 했으니(예송논쟁) 한심하다.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쑥대밭이었던 것이 엊그제 일인데 나라 힘을 기를 생각은 안 하고 상복 입는 일 가지고 당파싸움을 하다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우리나라가 가르쳐준(특히 이 퇴계) 성리학을 전쟁이 없던 250년 동안 사무라이들은 칼싸움 연습을 하는 대신 열심히 공부해서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깨달음을 얻은 반면 우리는 당쟁에 이기기 위한 지식으로 쓰였으니 똑같은 것을 공부해도 깨달음은 달랐다.
에도 막부가 들어선 이후 거의 250년 동안 일본은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였다.
전쟁이 없으면 칼 싸움질하는 사무라이는 할 일이 없다. 이때부터(1800년경) 사무라이들은 책을 독하게 읽으면서 칼을 버리고 책을 통해 배움을 얻기 시작했다. 오늘날 일본인들은 걸핏하면 신변잡기 같은 사소한 일도 무조건 책을 쓰는 버릇이나 지하철을 타면 책을 읽는 것은 아마도 이때에 생긴 습관이 아닌가 생각한다. 점점 머리가 깨이고 서구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 막부를 타도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하급 사무라이가 무시당하는 현실을 타파하고자 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고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조선도 200여 년 동안 큰 전쟁이 없었다. 임진왜란이 1592년에 일어났으니 조선 건국(1392) 후 딱 200년 만에 큰 전쟁이 터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에도 막부의 평화로운 250년과 조선의 200년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이냐라는 것이다.
조선도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 등 무사 출신이 세운 나라이고 에도 막부도 무사 사무라이가 세운 나라이지만 조선은 200년 후에 무사는 어디 가고 사대부들이 들어서서 좋은 머리를 나쁜 권력쟁탈에 쓰는 나라가 되었지만 일본은 약간의 혼란과 다툼은 있었지만 사카모토 료마라는 훌륭한 협상가의 노력과 그것을 받아들여준 훌륭한 지도자들 덕분에 에도 막부를 평화로운 방법으로 천황에게 헌납하는 대정 봉환의(평화롭게 정부를 천황에게 헌납함) 메이지 유신을 이룩했다.
사실여부는 역사학자들이 밝히겠지만 같은 성리학자이지만 현실을 중시한 이 율곡은 일본의 침입에(임진왜란) 대비해서 10만 군사를 양성해야 된다는 소위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반면 성리학의 대가라 하여 일본까지 그 이름이 자자했던 이 퇴계는 10만 군대를 기를 필요 없이 덕으로 일본을 잘 설득하고 다스리면 된다고 하면서 싸웠다고 하니 전쟁이 덕으로 다스려 될 일인지?
이 글을 쓰면서도 일본을 미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편치 않다. 우리가 일본에 뒤질 이유가 하나도 없었음에도 왜 우리는 일본을 정복하겠다는 생각 만주 연해주 아니 명나라 청나라 등을 정벌해보겠다는 전략이나 생각이나 욕심이라도 내본 이들이 없었는지. 그것이 평화를 사랑하는 착한 민족이기 때문인지? 900번이 넘도록 침략을 받아 얻어터지고도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계속 당하기만 하고 한번 때려보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과연 착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미화할 일인가? 이렇게도 우리에게는 지도자가 없었던가? 일본은 침범을 받은 일이 두세 번 밖에 없지만 늘 치안을 불안해하고 걱정하면서 일본은 늘 조선을 정복하고 나아가 명나라 청나라를 정복하려는 야욕을 갖고 있었는데 말이다. 몽고족이나 여진족 같은 떠돌이 민족들도 힘을 모으면 송나라 명나라를 정복했는데 설령 지더라도 한번 붙어나 보고 박살 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하는 객기를 부려본다. 이렇게 도전 정신이 없었던 선조들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젊은이들도 공무원이나 선생님 같은 정년이 보장되는 편안한 직장이나 대기업만을 가려고 하는 것일까?
4차 산업혁명이나 중국의 G2 부상 등으로 세계의 공장화가 되어가고 있는 이 판국에 또다시 오늘의 잘못으로 정치나 경제 전쟁에서 뒤처진다면 우리의 후손들이 어쩌면 2~30년 후에는 인구의 반이 잉여 인간이 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거운 마음이다. 로봇 한대당 얼마의 세금을 받아 그것으로 월급을 지급받는 일하지 않고 월급 받는 잉여인간은 인간의 존엄성이 없는 인간이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잉여인간의 숫자가 결정된다. 우리가 또 다른 덕혜옹주를 만들면 안 된다. 인간 중심의(Human centric) AI(인공지능)를 개발하지 못하면 인류 파멸이 올 수도 있는 때이다
오늘날 잘 사는 선진국들의 특징은 윗사람들의 솔선수범이 늘 선행되었다.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등의 지도자 특히 정치적인 지도자들의 모범적인 솔선 수법이 국민들의 적극적인 감동과 협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들고 목숨 내놓고 나라를 지키는 일이며 전쟁 등 어려운 일에 대통령의 아들 황실의 자녀들이 솔선수범하는 모범을 보였다는 보도들을 우리는 언론을 통해 심심치 않게 접해왔다.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이나 사회적인 지도자들은 온갖 인맥과 권력과 돈을 앞세워 자식들의 군 복무를 면제시키고 위장전입은 밥 먹듯 자행해서 자식들 좋은 학교 보내고 투기로 불로소득을 얻고 수입 소고기 먹으면 광우병 걸린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식들은 미국에 유학 보내고 음주운전은 살인 행위라고 하면서 자기는 만취한 상태에서 운전하는 등 일일이 입에 올리면 입만 더러워질 것 같은 상황과 비교하면 한숨만 나온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도 지도자들의 솔선수범과 해외의 선진 기술과 교육을 배우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해외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일본과 선진국과의 크고 높은 수준 격차를 통감하고 기를 쓰고 이들이 보고 배운 것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외국을 베끼고 훔쳐오고 공업화하는데 외국 유학파와 시찰단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솔선수범을 하였다.
이때 일본과 조선이나 청나라의 해외유학자의 숫자는 비교할 수가 없다. 심지어 이즈음 조선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중국 이외는 나가본 데가 없으니 영어를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에게는 천하의 역적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조슈 5 걸이라고 하는 동료 친구 5명과 함께 영국의 런던대학에 유학을 하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후에 미국의 예일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까지 받고 법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화학공학도가 일본의 제국헌법을 만들겠다고 독일에 머무르며 최초의 헌법을 만들어 냈다.
이때 유학을 같이했던 사람들이 돌아와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똑같이 청나라 조선 일본의 외국 사절단이 해외에 시찰을 갔다 왔지만 청나라와 조선은 가서 보고 배운 것을 하나도 실천하지 못했지만 일본의 장관 외교관 공무원 유학생 수행원들은 똘똘 뭉쳐 보고 느낀 것을 착실히 실천했다. 실천과정에서 국민이 말을 듣지 않거나 망설일 때는 과감히 솔선수범의 모범을 스스로 직접 보여 주었다.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은 1871년부터 1년 10개월 동안 해외 12개국을 돌아보면서 선진 기술과 제도를 돌아보고 그 격차를 통감하고 적극적으로 해외를 모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유럽에서 비교적 근대화가 늦게 시작되었으면서도 눈부신 발전을 한 독일을 모방하기로 하고 정부 주도하에 강력한 개혁개방을 실시했다.
이때 사절단 107명 중에 유학생들이 43명이나 포함되어있다 (사절단: 46/수행원: 18/유학생: 43). 이들이 후에 메이지 유신정부의 중심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인 유길준이나 서재필 등은 본인들은 노력하였겠지만 새로운 조선을 만드는 일에 유용하게 활용되지 못한 점과 비교하면 힘 있는 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국가 발전에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프랑스에서 잠사 기계를 사들여와서 최신의 잠사 공장을 만들었으나 그 당시 일본에는 요란한 기계 소리가 인간의 영혼을 빼앗아간다는 미신 같은 것이 있어서 여성 노동자들이 잠사 기계의 요란한 소리 때문에 작업자로 지원을 하지 않자 정부의 고위간부들의 자녀들이 직공으로 솔선수범하여 잠사 기계가 영혼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므로 서 국민들이 정부를 믿고 잠사 공장에 지원하는 여성 작업자를 모았다고 한다
일본은 배운 지식을 조선을 상대로 마음껏 휘두르고 단련시켜 러시아 만주 중국을 거쳐 1, 2차 대전까지 겁 없이 일으켰던 일들은 모두 다 해외 유학파들의 산물이다.
조금 자신감이 생기면 늘 객기를 부리게 되어있다. 해외에서 배운 지식과 무기들을 군국주의의 못된 생각에 쓰려는 자들이 설치게 되어있고 그들의 잘못된 지식 사용이 참혹한 전쟁과 이웃들에게 고통을 안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우리나라가 6.25 전쟁의 폐허에서 세계 10위 전후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도 뒤늦은 우리 부모님들의 한에 맺힌 교육열 덕으로 한때 대한민국이 미국 유학생 숫자가 일본 중국 인도를 뛰어넘는 1등 국가로 지낸 덕분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얼마나 해외유학이 국가발전에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새겨야 될 일이다. 지금은 배가 좀 부른 탓인지 일본과 한국은 해외까지 안 가고 국내에서 공부해도 된다는 생각이 언제부터인지 생기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경쟁력을 중국 인도에게 빼앗기고 있다. 지금은 중국과 인도의 유학생수가 대한민국을 능가하고 있다.
우리 주변을 한번 돌아보라 어느 하나 우리가 발명한 것이 있는가 전기 가스 자동차 냉장고 세탁기 TV 컴퓨터 핸드폰 카메라 치약 칫솔 변기 침대……. 이제는 우리가 보답을 해야 할 차례인데 도무지 이 세상에 없는 것에 도전해보겠다는 도전 정신이 부족하다.
남이 만들어놓은 좋은 환경 좋은 시설들의 혜택을 누리려고만 한다. 선배들이 힘들여 만들어 놓은 환경 좋은 건물과 시설이 잘된 빌딩을 가지고 있고 월급도 많이 주는 대기업에 다니기를 원한다. 그러면 남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힘든 곳에서 남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것을 내가 만들겠다는 생각은 누가 해야 될까?
짬뽕으로 유명한 일본 나가사키에 가면 미국의 페리 제독이 1853년에 입항한 건을 기념하는 공원과 기념탑이 있다.
오늘날 일본은 두 번의 미국 도움으로 세워진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번은 페리 제독의 일본 개항이고 또한 번은 2차 대전 패배 때 미국의 맥아더 장군에 의해서다.
우리에게는 이런 기회들이 없었을까? 그러면 어떻게 세계 10위를 왔다 갔다 하는 나라가 되었겠는가?
혁신적인 문제 해결방법이라는 기법들에는 모두가 남의 의견을 비판하지 않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방법의 토론 방법을 채택해서 문제점을 찾아내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기법들을 사용한다. Brainstorming기법도 그중에 하나다.
늦기 전에 4차 산업의 혁명이 고착되기 전에 우리도 힘을 합쳤으면 한다.
Brainstorming 하자. 고착되면 끝이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빨리 하자. 그러나 제발 가짜들이 설치게는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