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세현 Mar 21. 2020

머미의 마지막 배웅

아직 다 크지도 않은 농장 고양이 '머미'가 얼마 전부터 배가 불룩하게 해서 돌아다녔다. 나가서 연애를 하고 왔다는 것 같았다. 자연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머미는 엄마가 되기에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직 너무 작은데 새끼를 가진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머미는 '개냥이'에 가까웠다. 주인을 좋아하는 것뿐 아니라, 아무나한테 좋다고 하는 편이다. 이름을 부르면서 내 무릎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 무릎에 바닥의 흙과 함께 올라와서 금새 자리 잡고 턱을 괜다. 가끔 머미의 배에 손을 가만히 대어 보기도 했다. 머미의 배는 완전히 둥글지 않고 마늘처럼 굴곡이 있었다. 저 속에 몇 마리나 들었을지, 건강하게 크고 있는 건지 알고 싶었지만 손이 둔한 건지 박동을 느낄 순 없었다.


그러다가 이틀 전에 배가 홀쭉해졌다. 그때 농장장님은 구멍 낸 드럼통에 쓰레기를 태우시고 있었다. 나는 퇴근하기 위해 신발을 갈아입으면서 그 모습을 스치듯 봤다. 아침이나 퇴근 전에 쓰레기를 태우는 농장장님의 모습은 일상이었지만, 그 곁에 가만히 앉아 불을 쬐는 미는 조금 생소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불이 어느 정도 잦아들었는지, 농장장님이 사무실로 들아오면서 말했다.

"머미가 왜 새끼를 돌보지 않았을까?"

혼잣말 같기도 하고, 내게 묻는 말 같기도 했다.

"새끼 낳았어요?"

내가 머미를 보면서 물었다.

"창고에 네 마리 낳았는데, 죽었어."

"다 죽었다고요? 새끼는 어딨는데요?"

"화장해줬어."


왜 죽었을까. 머미가 보살피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었고, 새끼가 죽은 채로 세상 밖으로 나왔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엄마가 보살피지 않아도 하루 밤 사이에 죽진 않았을 것 같아 믿기지 않았다. 상황이 나쁘면 동물은 자식을 기르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라 내가 머미를 괴롭게 했던 것일까 되짚어 보기도 했다. 한데 무엇보다 걸리는 건 오히려 머미가 너무나 어렸다는 사실이다. 머미에 배에 한참이나 손을 대고 있었지만 움직임을 느낄 수 없었던 것도. 머미는 태어나서도 울거나 숨 쉬지 않는 새끼들을 달리 방법도 없이 밤새 핱기만 했을 수도 몰랐다.


새끼는 어디에 있는지 농장장님이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알수 있었다. 머미는 움직이지는 않지만 보였던 새끼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가, 불 가운데 있었다가, 아예 사라져 버리는 과정을 이해하고, 불가에 앉아 모두 지켜보았을까. 불가에 앉아 울지도 장난치지도 않고 가만히 자리를 지키던 머미의 모습이 오래 떠오를 것 같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