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모시고 할머니 집으로 소풍 간 날
그 날은 아버지와 함께 요양원에서 할머니는 모시고 바람을 쐐러 할머니 집으로 간 날이었다. 우리는 오전 7시에 할머니를 모시러 가기로 했다. 7시라고 듣고 갸웃했다.
'그렇게 일찍?'
내게 7시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7시에 만나려면 6시에는 일어나야 씻고 이동해서 만날 수 있으니까. 할머니에게도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날 6:40쯤 우리가 도착하자 할머니는 더 일찍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모든 준비를 마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계셨으면서도 기다리지 않는 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할머니는 테이블 위에 종이가방과 지방을 챙겨 두고 로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양말도 말끔하게 신은 채로. 로비 소파에는 텔레비전이 있었다. 그곳에서 일찍 아침 식사를 마친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지만, 할머니는 티브이를 정면에 두고도 '로비 소파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종이가방에는 할머니가 마실 따뜻한 물과 얇은 솜 외투 그리고 우리 마시라고 챙긴 박카스, 두유가 담겨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대체 언제부터 일어나서 준비를 한 것일까 궁금했지만, 아버지도 나도 그것에 대해 물어볼 수 없었다.
내가 군에 입대해 훈련을 마치고 첫 외출 날 아버지는 늦게 왔다. 11시에 오기로 해놓고 12시가 다 되어 왔다, 철 지난 꽃 남방을 입고서. 그때는 아버지가 막 밉기도 하고 너무 좋기도 하고, 철 지난 꽃 남방이 부끄럽기도 하고 막 복잡한 감정이 되어 스물두 살 남들보다 늦게 입대한 주제에 코 끝이 찡해질 정도였다. 할머니가 로비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에서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누군가 나를 데리러 오지 않으면 군대라는 공간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아버지 손 말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한 손엔 내 손을 다른 손엔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할머니가 무릎이 지금처럼 많이 나빠지기 전에는 할머니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그런 쪽으론 숫기가 없는 편이었다. 할머니 손은 평생 농사일을 해서 그런지 농사를 안 한지 오래되었어도 손이 검었고 쪼글쪼글했다. 그 검고 쪼글쪼글한 손을 보면서 나무껍질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겼으니 분명 손도 차고 딱딱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할머니 손은 따뜻하고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손에 쪼글쪼글한 주름이 쿠션처럼 내 손을 감쌌다. 하지만 그 얇은 주름 너머에는 살이 아닌 뼈가 곧바로 느껴졌다.
할머니와 나의 신장 차이는 한 뼘이 넘고, 할머니는 등도 조금 굽어 손 잡고 걷기에 좀 어색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머니가 편한지 모르겠어서 할머니 걷는 걸 살폈지만 할머니는 좋다 나쁘다 말도 없이 그저 한발 또 한발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고 걷고 또 신발을 신었다. 차에 오를 때는 차라리 내가 안아드리면 편할 텐데 하고 생각했지만 할머니는 굳이 내 손을 잡고 간신히 차에 올랐다. 할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의 고군분투를 보는 일은 멋지다고 하기에도 안타깝다고 하기도 어려운 뒤죽박죽 감정의 지점이 있다. 운전석에 앉아 키를 돌리고 잠시 예열을 하는 동안, 할머니가 잡고 있던 내 손을 잠깐 봤다. 할머니가 차에 오르려고 줬던 힘이 남아 있었다. 내 손이 미덥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었지만, 그건 꽉 쥐면 부서질 만큼 약한 힘이었다. 계란 같기도 물풍선 같기도 했다. 그런 힘 앞에선 왠지 모르게 조금 죄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시골, 그러니까 할머니 집에 도착하자 할머니는 입구에 놓인 돌에 앉았다. 할머니가 늘 평상처럼 앉던 곳, 마당 입구에 놓인 돌이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핸드백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내게 줬다. 나는 그 담배를 받아 물고, 잘 타들어가도록 불을 붙여 몇 번 빨아낸 후에 할머니에게 돌려줬다. 할머니는 이제 라이터로 불을 키는 것도, 그 불로 담배가 적당히 타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어려워진 모양이었다. 아버지에게나 삼촌에게도 그렇게 부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명절에도 늘 내게 그렇게 한다. 그래서 명절에는 담배를 여유 있게 준비해서 할머니 핸드백에 한두 갑씩 넣어둔다.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 그리고 그것을 도와주는 것은 기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손자가 할머니에게 담뱃불을 붙여 주는 일은 바람직한 일인지 그렇지 않은지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면 그런 게 뭐 중요한가 싶어 지기도 했다.
할머니는 명절이나 외출을 나올 때, 즐거운 기색도 없이 한 잔씩 마시고, 한 모금씩 태웠다. 그래도 평생 피웠던 담배가 간간히 피우고 싶지 않을까 싶었는데, 할머니는 요양원에 지낸 후부터 그 좋아하던 술도 담배도 끊었다고 했다.
"요양원에선 술 담배를 못 하게 하는 거야? 그래도 좋아하는 건 하게 해야지"
할머니에게 담배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천진하게 물어봤다. 그때는 스스로 담배에 불을 붙여 태우셨던 때다. 그때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말을 했던 것 같고, 또 다른 말을 한 것 같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있지만, 정작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는 흐릿하다. 대화의 분위기만 기억난다, 나라면 "그냥"이라고 했을 법한 분위기였다는 것만. 할머니의 그 흐릿한 이야기에는 조금의 자부심도 있었다. 그 어려운 걸 해냈다 할머니가 했다 약간 그런 느낌인데, 그러면서도 내게는 단 한 번도 담배를 끊어야 한 거나, 할 수 있다거나, "야! 나도 했어"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할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늘 크던 작던 에너지를 전해 받는 느낌이었다. 수능에서 기대에 못 미쳤을 때, 졸업 후에 곧바로 취업이 되지 않았을 때, 회사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할머니 버프를 받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곤 했다. 내 잘못에 대해서만 내 부족함에 대해서만 내심 생각하면서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들다가, 번뜩 허리를 펴게 되는 것이었다, 맞아 네 잘못도 있어! 하고. 그렇게 몇 번이나 동굴 깊이 기어들어가려다가 아차차하며 빠져나왔다. 그건 순전히 할머니의 낯설고도 따뜻한 배려 덕일 것이다.
얼마 전 아버지가 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에 다녀온 얘기를 해줬다. 코로나 때문에 창 밖에서 면회하듯이 잠시 대화를 나누고 반찬을 전해주고 왔다고 했다. 어서 코로나가 물러갔으면 좋겠단 생각, 그래서 할머니에게 지포 라이터로 담배를 태우면 얼마나 더 맛있는지 알려주고 싶다는 철없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가 없다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다. 좀 더 오랫동안 '누군가의 손주'로 지금처럼 우주최강 마이웨이로 철 모르고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