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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입가경 May 25. 2020

무기력하지 않을 이유

92914-Okinawa

https://youtu.be/KzHOPckFmwc

오늘의 글과 어울리는 곡은 92914의 Okinawa 입니다.


밖순이 성향에 맞지 않게 집순이 모드로 지냈다. 일을 하거나 오래전부터 잡은 약속이 아니면 가급적 집에 있었다. 꽃을 보고 바질을 키우고, 빨래를 하고, 밥을 차려먹었다. 너무 답답한 밤에는 집 앞 벤치에 나가 밤바람을 마셨다. 몇 달을 코드 빠진 선풍기처럼 지냈다.


코로나19는 잠잠해지지 않고 빠르게 모양을 바꿔 평범한 마음을 좀먹는다. 리디셀렉트에 이어 최근 왓챠플레이까지 정기결제를 시작하는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좋아하던 코인노래방과 영화관은 이제 꺼리는 공간이 됐다. 매년 찾던 전주국제영화제는 코로나19 여파로 온라인 개최를 결정했고, 매해 때 되면 자연스레 누리던 것들이 까마득해졌다. 서울재즈페스티벌이나 부산국제영화제도, 복작한 여행도 딜레이가 최선인 날이 오래 이어질 것 같다.


큰 상황 앞의 개인은 참 작다. 할 수 있는 게 몸을 건사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젖어드는 무기력을 코로나19 탓이라며 그대로 두었다. 에너지 소비가 없어서인지 좋은 점 하나는 알람 없이도 새벽에 깬다는 것. 대부분은 그대로 다시 잠들었는데, 4월의 글에 언급했던 것처럼 재수(@jessoo) 작가님의 피드를 보고 <미라클 모닝>을 읽은 뒤로는 그 새벽을 붙잡아보고 싶어 졌다.


몇 번의 중도포기로 생산적인 루틴을 완벽히 익힌 건 아니지만 하루를 오래 쓰기 시작했다. 눈을 뜨자마자 기지개를 켰다. 스탠드를 켜고, 인스타그램에 시간제한 설정을 다시 걸어 두었다. 대신 핀터레스트에서 사진과 이미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덕분에 휴대폰 배경화면도 바꿨다. 윤슬이 반짝이는 바다 사진으로.

 


1월부터 바다가 너무 보고 싶었다. 파도를 듣고 만지고, 윤슬 사진도 철컥철컥 찍고, 좋아하는 노래 들으면서 마냥 하늘도 보다가, 바닷바람에 덜덜 떨면서도 좋다고 웃고. 날이 풀리면 가야지 그랬는데 벌써 6월을 일주일 앞두고 있다. 장롱면허가 아니었다면 바다를 만날 수 있었을까, 어영부영 타이밍만 재다가 올해가 가버리지는 않을까. 조바심은 나는데 묘하게 기력이 없다. 습관으로 얼추 자리 잡던 헬스와 요가도 이제 몸이 낯설어할 정도로 오래 쉬었다. 소소한 즐거움이던 브런치 연재도 미루고 있었다.


덤처럼 얻은 새벽 시간에는 주로 무기력하지 않을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아른거리는 조카 얼굴, 깜깜할 때 옆을 지켜주던 사람들, 지나치기엔 너무 좋은 날씨, 우리 엄마 아빠, 아직 읽지 못한 책들과 사지 건강한 나, 그리고 아직 못 본 올해의 바다까지. 작은 것들을 틈틈이 생각하다 보면 몸을 움직일 기운이 들었다.


행동반경이 좁아들면서 좋은 점은 사소한 성취가 주는 행복감을 예민하게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환기를 하고 아침 볕에 빨래를 말리는 일이나, 얼린 청포도를 집어 먹으며 이렇게 글을 쓰는 일을 기다리게 됐다. 모처럼 오래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위클리 플래너를 다시 펼치고, 목표가 적힌 메모를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고, 브런치에 더 자주 글을 올릴 수 있는 틀을 짜보기도 하면서 집에 붙어있을 이유를 계속 만든다.


미라클 모닝 챌린지를 지속한 지 7일 차인 오늘, 드디어 밀린 글을 쓴다. 삶의 큰 테두리는 아직도 잠시 멈춤이지만, 새벽의 기지개와 적은 양의 독서가 쌓이고 있다. 메모가 남고, 매일 하는 팔 굽혀 펴기 조금과 플랭크가 모여 근육을 만든다. 기력이 없으면 없는 대로, 명상 시간에는 깜빡 선잠에 빠지기도 하면서 다시 마음을 닦는다. 중력보다 무거웠던 무기력의 시간이었는데, 몇 번의 부지런한 아침만에 날이 갠 것처럼 하루가 맑다. 6월에는 바다를 보러 갈 수 있을까?




아래는 왓챠플레이를 결제하게 만든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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