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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입가경 Mar 09. 2020

에세이 시작하기 좋은 나이

Claustrophobic-PJ Morton

https://youtu.be/3isCf4_WA-s

*오늘의 글과 함께 들으면 좋을 음악은 ‘Claustrophobic-PJ Morton’입니다.

(컴퓨터/아이패드 환경에서는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글은 좀 쓰고 있어?"

그냥 뭐. 프리랜서 작가로 전향한 후 돈 버는 글은 꾸준히 썼지만, 스스로 구상했던 몇 가지 글들은 운도 떼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퇴사 후 무작정 내 시간이 많아지면 쓸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어영부영 몇 달이 지났고 서른을 맞았다. 앞자리가 바뀌는 경험은 10년 만이라 연초를 말랑하게 보냈다. 친한 친구도 둘이나 결혼을 하고, 다들 자리를 잡거나 새로운 삶의 장막을 여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정말 지금 이대로 괜찮을까?'

처지를 비교하는 마음이 자꾸 깃들었다. 마음이 복잡해져서 서랍 정리를 시작했다. 머릿속을 열어볼 수 없을 때 대신 서랍을 열어보는 일을 좋아했다. 속이 깊은 맨 아래 서랍에는 작은 수첩 뭉치와 쪽지들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 학교 앞에서 받아온 미대 입시학원 수첩에서부터 새내기 때 받은 롤링페이퍼까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오래된 것들을 만지고 펼쳤다. 앞 장만 쓰다 만 수첩들이 많았다. 혹시 쓸만한 아이디어나 기록이 있을까 싶어 뒤적거리다가 빨간 수첩 사이에 영어로 씌인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내 이니셜인 K로 시작하는 영어 이름 몇 개와 메일 주소, 스마일 마크를 보다가 한 친구가 떠올랐다.


스물넷 여름, 봄의 마라톤 대회에서 만나 친해진 라리사. 당시 만 스무 살을 넘긴 초록눈의 친구. 한국에 머무는 동안 두어 번 만난 게 전부지만, 그 날들은 나이에 관한 가치관을 뭉게 버렸다. 라리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인 '캠프힐'에서 1년간 시간을 보내다 왔다고 했다. 그곳에서 만난 한국인 언니를 따라 즉흥적으로 한국 여행을 결정하고, 마라톤 대회 참가를 선택했다. 마침 대학 졸업 후 해외 체류를 고민하고 있던 나의 사정을 알던 언니가 그 자리에서 라리사를 소개했고, 얘기가 잘 통해 만남이 몇 번 더 이어졌다.


쪽지를 쓰던 날 우리는 상수에서 카레맛 치킨을 뜯었다. 잘 못하는 맥주도 한잔씩 시켜서 나이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매개로 서툴지만 천천히 몇 마디를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삶과 선택에 책임감이 있는 라리사가 어른스러워 보였다. 단단한 스무 살을 보고 있자니 조바심이 들기도 했다. 당시 늘 품고 다니던 고민은 ‘너무 늦지 않았을까?’였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앙증맞지만)


졸업 후 빠르게 진로를 선택하던 친구들 틈에서 방황하던 시절에는 스물 넷이라는 나이가 애매한 높이의 허들처럼 모든 시도 앞에 세워져 있었다. 암묵적으로 합의된 삶의 속도에 어긋나는 기분에 주춤거렸다. 라리사는 그 허들을 대신 걷어차 주는 역할을 많이 했다. "늦은 건 누가 정하는 거야?"라든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일단 해봐야 즐겁지."같은 말들로. 또, K로 시작하는 영어 이름을 같이 고민해주거나, 정보를 참고하기 좋은 사이트를 알려주는 실질적인 도움들로. 합심해서 무너뜨린 허들 덕분에 다음 해를 캐나다 캘거리에서 보냈다. (그때 적어두었던 일기도 연재해보고 싶다)


스물넷, 서른

졸업이나 입학처럼 구분선이 명확하지는 않아도 인생에서 방점을 찍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쉽게 드는 나이인 것 같다. 스물넷의 고비는 잘 넘겨놓고 서른에 다시 같은 고민에 빠질 줄이야. 스물넷 언저리의 동생들이 새로운 시작을 망설일 때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라리사의 말을 빌려 쓰는 사람이면서 말이다. 각자에게 맞는 삶의 속도가 다르다는 걸 자꾸 까먹는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냥 해볼 것'

6년이 지났지만 그때 나눈 대화들이 등받이처럼 아직까지도 삶의 여러 부분을 지탱한다. 하루라도 젊을 ,  많은 날을 즐겁기 위해 하고 싶은 일들을 꾸준히 해보자.  결심이 새롭게 들자마자 브런치를 켰다. 조금 길게 돌아왔더라도 하는 것에 무게를 둔다. 그렇게  에세이의 제목을 적었다. "에세이 시작하기 좋은 나이". 그리고, 좋아서 찍어둔 사진도 불러왔다. "Age doesn't matter unless you're a che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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