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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입가경 Feb 05. 2021

편안함에 이르는 다섯 단계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고 새해 목표를 세웠다

샤워하면서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물을 맞다 보면 이마에 좋은 생각이 맺힌다. 그럴 때면 '생각은 물의 속성인가?' 생각한다. 이어서 '생각이 증발한다'는 문장을 떠올리다가, 역시 물의 속성이라 그런가 한다. 흐르는 물을 볼 때, 채워진 물 잔을 볼 때, 샤워를 할 때, 욕조에 몸을 담글 때 종종 아이디어가 울컥한다. 흐르기 전에 담으려면 좋은 그릇이 되어야지. 증발하지 않게 적당한 온도로, 얼어버리지 않게 뜨듯한 느낌으로, 넘치지 않게 속이 깊은 그릇이 되어야지. 물 샐 틈 없이 단단한 내부를 지녀야지.


그릇의 크기는 꽤 오래전부터 키우고 싶었다. 기억나는 시점은 웃는 얼굴이 해가 든 것처럼 예쁜 언니가 목화솜 배지를 준 날부터였다. 남의 허물을 목화솜처럼 포근하게 감싸주자는 의미였다. 그 하얗고 동그란 모양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따뜻하게 포용하는 언니의 습관을 아직도 동경한다. 사려 깊은 마음은 통찰력에서 나온다.


단단한 내부를 원한 것은 작년부터였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는 동훈이 지안을 사무보조로 채용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특기가 달리기라서. 내력이 있다는 거잖아. 건물이든 사람이든 내력이 중요해. 단순하고 강단 있어 보이잖아."

펑펑 울다가 웃다가, 단순하고 강단 있는 지안을 예뻐하기 시작한 후로는 한동안 '내력'이라는 말에 꽂혀서 단단한 뿌리를 지닌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상황이 맞아떨어지기도 했다. 긴 연애의 끝, 들쑥날쑥한 벌이와 코로나, 도피처도 기댈 곳도 사라진 새까만 연초였다. 더한 것도 버텨낸 지안처럼 나도 그렇게 해보자. 그러다가 깜빡 한 해가 지났다. 그리고 다시 새해, 시작점에 다시 서서 작년을 돌아봤는데 어라? 버텨졌다. 어떤 노력으로 1년을 채웠더라.  



1단계, 간절히 바란다.

돌이켜보면 간절히 바라는 마음부터였다. 언제든 소원을 빌 수 있는 순간이 오면 틈틈이 내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빌었다. 고요한 마음을 갖게 해 주세요, 하고. 심플한 목표지만 어려웠다. 몇 키로를 감량하고 싶다거나, 새 경험을 쌓고 싶다는 소원보다 추상적이고 무거웠기 때문이다. 방법을 잘 몰라 무작정 빌기부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유난히 동그란 달을 보거나 초를 불 때면, 눈을 감고 잠들기 직전이나 하루를 시작할 때에도 틈틈이 빌었다. 그러다가 조금씩 방법을 찾았다.



2단계, 움직인다.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리하지 않고 방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베란다로 조금씩 반경을 넓혔다. 침대 밖으로 나와 소소하게 밥을 차려먹고, 베란다 환기를 하고, 바질을 키웠다. '내력'을 '맷집'으로 해석해보고 닥치는 대로 일도 했다. 전체적인 기반이 튼실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행히 봄부터 일이 차근차근 들어왔다. 시간이 빠듯해도 거절하지 않았다. 밤낮없이 일을 하다가 이래도 되나 싶을 때쯤, 디자인샤우어 김종필 대표의 브랜딩 강연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 그때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일과 삶의 경계가 불분명할 때 워라밸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그러자 관점을 비튼 답이 돌아왔다.

- "왜 경계가 있어야 하죠? 일이 삶이고 삶이 일일 수도 있죠. 일이 즐거우면 그 경계가 없어도 괜찮죠."

내력이 느껴지는 단단한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즐거운가? 생각했다.



3단계, 내 리듬을 찾는다.

즐거웠다. 다만 완벽한 휴일이랄 게 없으니 규칙적인 해방감만 없을 뿐이었다. 그래도 낮의 사진 출장과 밤의 글 작업이 서로의 단점을 완충했고, 휴일에 밀도 있게 일해서 평일 낮에 친구를 만났다. 워라밸은 밖에서 끌어온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와 어울리는 단어는 리듬이 아닐까? 좋아하는 일을 지속할 수 있는 건강한 리듬을 찾아야 했다. 일상의 작은 부분부터 조율해보기 시작했다. 적정 수면시간은 얼만큼인지, 작업이 잘되는 조도는 어느 정도인지, 어느 노래를 들어야 집중이 잘 되는지, 쉴 때는 어떻게 쉬어야 회복이 빠른지까지.    


* 발견한 리듬 : (tmi 주의)
일을 할 때는 형광등과 스탠드 모두를 밝히고 눈의 피로도를 더는 게 좋고, 이렇게 브런치 글을 쓸 때나 책을 읽을 때에는 눈이 침침하더라도 스탠드 불만 켜는 게 좋다. 작업  속도를 내려면 피아노 곡을 듣고, 브런치 글을 쓸 때는 재즈나 로우파이를 듣는다. 밤 시간에 잔업을 할 때에는 템포가 있는 팝 음악을 들으면 덜 졸리다. 그리고 커피 알러지를 발견했다.(충격) 언제부터 생긴 건지 모르겠다. 여러모로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밤마다 간지럼증을 동반한 두드러기가 났다. 가끔은 낮에도 그랬다. 원두 내리기가 귀찮아서 한 3일을 안 마셨다가 피부가 잠잠해진 걸 보고 알아버렸다. 그래도 친구들 만날 때는 그냥 먹고 간지러워지는 쪽을 택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CfPxlb8-ZQ0

지금 글 쓰면서 듣는 음악


https://www.youtube.com/watch?v=AWo2drB8ZRc

밤에 작업할 때 듣는 음악


4단계, 루틴화한다.

미라클모닝에 심취한 나머지 새벽 기상을 무리해서 지속하다가 만성피로를 얻은 적이 있다. 취침 시간 때문이었다. 5시 30분에 기상하면서도 어영부영 새벽 1시 넘어 잠드는 날이 많았다. 적정 수면시간인 7시간보다 한참 어긋난 세팅이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수면 부족 상태를 유지하다가 결국 실패했다. 일찍 잠들 수 없는 걸 아는 요즘은 7시 전 기상으로 알람을 설정하고 신기하게도 그전에 알아서 눈을 뜬다. 딱딱한 베개를 베고 자서 그런가. (SNPE 편백나무 베개 10구짜리 쓰는 중, 초반에는 아파서 악몽도 꿨다)

일어나자마자 아침 일기를 쓴다, 아침에 펜을 잡기까지가 버거워서 휴대폰 할 일 앱 메모 칸에 적는다. 침대에서 10분짜리 스트레칭을 하고, 공복에 물 한 잔을 벌컥벌컥. 원래는 아침을 간단히 차려먹고 업무를 시작했는데 2월부터는 9시~11시 구글 Meet 출근제도를 이용해 프리랜서 친구들과 생산적인 2시간을 보내고 있다. 순간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가, 몰입해서 작업하고 있는 친구들 면면을 보면 다시 자세를 고쳐 앉게 된다.


루틴화의 포인트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수준으로 마음껏 낮추는 것이다. 정확한 수치로 된 계획도 실행을 돕는다. 예를 들면, 나는 매일 조금씩 운동을 한다. 팔 굽혀 펴기 15개와 플랭크 60초가 전부지만, 빼먹기도 아까운 강도이기 때문에 지속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보정 3장 이상, 30분 글쓰기 이런 식으로 할 일을 세팅한다. 최근 읽은 책인 <진짜 게으른 사람이 쓴 게으름 탈출법>에서도 비슷한 해답이 있다. '밀린 설거지 하기'보다 '책상에 있는 컵 싱크대에 담그기'부터 시작하면 난이도가 확 낮아져서 다음 단계로 갈 힘이 생긴다. 성취감이 모이면 근육이 된다. (또 다른 예로, 마크 맨슨은 '헬스장 가기'가 힘들면 '운동복으로 갈아입기' 습관부터 들이라고 말한다. 생각보다 너무 간단해서 이렇게 까지 했는데도 운동을 안 가면 내가 병신이지...라는 생각마저 들어서 효과적이라고)

 


5단계, 파이팅해주는 사람을 곁에 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파이팅"

드라마 <나의 아저씨> 중에서 너무너무 좋아하는 대사. 동훈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 지안이 한 말이다.

혼자서 내력을 잘 다지는가 싶다가도 (특히 연초에는) 몇 번이고 넘어졌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의 밥 먹자는 소리, 친구의 뜬금없는 연락, 동료의 파이팅이 나를 일으켰다. 뿌리내린 나무가 낙엽을 떨구고 다음 계절을 준비할 수 있도록 부는 바람처럼, 항상 2프로 부족한 나를 완성하는 건 내 편들의 온기였다.


단 한 명으로도 충분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줄 사람 말이다. 나의 지안은 보통 엄마인데, 부재를 상상하는 시늉만 해도 끔찍하고 시무룩해져서 어떻게든 더 오래오래 같이 있어보려고 꾀를 쓰고 있다. 이를테면 건강한 식단의 요리를 만들어 야금야금 먹인다거나, 저녁 후 같이 목적지 없는 산책을 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요즘 같은 언텍트 시대에는 책이나 에세이를 읽는 것도 큰 파이팅이 된다. 이석원의 <2인조>가 참 좋더라.)


<2인조>에서 특히 좋았던 것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이제는 다시 빠르다. 편안함에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내면을 단단하게 만드는 방법은 결국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걸까?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불필요한 생각을 줄이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단순하고 강단 있게 말이다. 올해는 특별한 목표 없이 하루 단위로 작은 계획을 이루면서 살고 있다. 이를테면, 오늘 계획이었던 '목요일에 브런치 글 업로드하기'를 오랜만에 체크할 수 있게 됐다. 자정을 조금 넘겼지만 그래도 기쁘네.

어떤 경로로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도 편안함에 이르길.





https://www.youtube.com/watch?v=yJz9Ll9ZPj8

오늘의 노래는 <나의 아저씨> OST Dear Moon을 부르는 아이유. 지안처럼 보여서 좋아하는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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