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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빈 Dec 29. 2022

슬픔이 없는 삼십초

2022 연말정산


하루에 겨우 삼십초에서 일 분, 해가 조금씩 빨라졌다 늦어졌다 일년이 지나간다. 그 삼십초에서 일분만 한 하루의 크기는 매일 가늠할 새 없이 지나고, 어느새 후루룩 해가 줄어 긴 어둠이 시작되면 그제서야 주섬주섬 의식없이 밝아지고 어두워졌던 하루하루를 떠올린다. 올해도 똑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겨우 자라 내가 되었구나 하지만 ‘장하다’는 말을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해준 친구가 있어서 제법 성공한 한 해 같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올 해, 내가 가장 마음에 담았던 문장은

“멋지게 살려하지 말고 무언가를 이루려 해라”. 심보선 산문집에 나왔던 말인데 그가 한 말은 아니고 그의 아버지 말을 인용한 것이다. 심보선 시인처럼 나도 이 말이 쏙 박혀버렸는데, 그저 멋있기가 인생의 목표였던 사람에게 이 말은 결국 한 번은 떨어지게 되는 절벽인 것만 같아서. 그래서 울컥하고 그만두고 싶을 때면 이 말을 떠올렸다. 무언가를 위해 내 멋을 포기할 만큼 철이 들어보고 싶어서. 그러고나니 올해는 조금 수월하게 보낸 면도 있는 것 같다. 뭐야 멋을 포기하니 인생 별 것 아니네.


그런데도 나는 심보선처럼 이 말에 드는 반감을 느낀다. 멋을 포기하라니, 그건 영혼없이 살라는 말 아닌가? 나는 매번 이 말에 동조할 수 없어 또 영혼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나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길어지는 어둠처럼 그대로의 나로 있다.


결국 올해 나에게 의미있던 일은 의미있든 삶과 멋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그저 이런 나 저런 나도 다 괜찮다고 뭐 어떠냐고 스스로 말해준 것이다.

무언가를 이룬다는 것이 세속적이고 타협하고 뻔뻔해지는 것 같다 생각했으나 남들은 못해서 안달인데 나는 할 수 있는데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생각, 그러니까 조금 비겁하게 필연적 실패에 대한 변명을 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내 멋을 추구하는 태도가 없었더라면 그저 세상이 정해놓은 가치대로 휩쓸려 지금의 내가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진짜로 가치를 갖고 해낼 것이냐를 찾아내는 데 이런 멋은 필연적인 것이다.


지난해에는 책을 쓰면서 내가 거부하고 싫어하던 내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것도 괜찮다고 말해줬다면, 올해는 이런 면, 저런 면도 그저 나임을 받아준 나 자신 대통합의 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양가적인 나 자신을 이해하면 독선적이게 될 줄 알았더니 아이러니하게도 남을 이해하기도 조금 수월해진다.


사나운 애착, 에브리씽에브리웨어올앳원스, H마트에서 울다, 수프와 이데올로기…

올해 내가 유난히 많이 봤던 콘텐츠들을 떠올려본다. 나와 통합하는 일은 결국 내 가족을 받아들이는 일 같기도 하다. 유독 엄마와의 애증을 다룬 딸들의 이야기를 참 많이도 봤네.


“나는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직계가족에서도 벗어나고 싶은데 타인과 새로운 가족을 만들라니, 제정신인가. 아버지의 딸, 오빠들의 여동생, 여성, 재일코리안 같은 명사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족을 향해 카메라를 든 이유도, 도망치기보다 그들을 제대로 마주 본 다음에 해방되고 싶어서였다. 영화 하나 만들었다고 무엇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손목 발목에 주렁주렁 차고 있는 그것들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내야 했다. 알아야만 비로소 벗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양영희 감독의 에세이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에서



이제 마지막으로 올해의 연말정산.


1. 올해의 사건: 두 번의 이직, 까미와 순당이(, 풀 업 성공)

2. 올해의 영화: 에브리띵에브리웨어올앳원스

3. 올해의 대사: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4. 올해의 책: 토니 모리슨 <타인의 기원>, 이광석 <데이터 사회 비판>

5. 올해의 문장: “멋지게 살려하지 말고 무언가를 이루려해라” - 심보선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6. 올해의 음악가: Videoclub, Peach fit, 그리고 올해 10주년을 맞은 Say sue me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

7. 올해의 흥: 2022 펜타포트 (최고의 공연: 모과이)

8. 올해의 술: 메이커스 마크

9. 올해의 술자리: 유기체에서 위스키 먹던 날, 여름밤의 이태원 와이키키

10. 올해의 시리즈: 작은 아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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