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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KCHIC Feb 15. 2016

절망과 희망 사이

The Bicycle Thief (1928)

 니체는 말했다. 희망은 재앙이라고.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비극을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으로 설명하며, 결국 인간이 끝없는 고통에 빠지면 무언가 그 고통에 대한 의미를 찾고, 우리는 그 고통을 이겨내는 힘으로 인해 살아간다고 했다. 끝없는 절망으로 점철된 삶을 희망으로 이겨내는 것, 그것이 우리다.


 1945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더 이상 화포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폐허가 된 세상은 참혹했다. 극심한 경제 침체와 실업난은 물론이거니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과 더불어 인간 본연의 가치 자체가 무너져버린 ‘상실된’ 시대 그 자체였다. 모든 것이 바닥을 드러내보인 사회는 암울하고, 냉소적이며, 마치 마비라도 걸린 듯, 달려나가지 못하고 그대로 멈추어진 채 내내 그렇게 지속되었다.


절망과 희망의 연속


 리치는 그런 정체된 로마의 한 쪽에서 주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무슨 일이라도 해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루는 실업자 무리와 달리 리치는 거의 자포자기한 모습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 때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터덜터덜 조금 빠르게 뛰어가는 리치는, 마치 계시라도 받은 듯 뜻밖의 일자리를 받고서 기뻐하기 보다는 절망한다. 자전거 때문이다.


 리치는 이 자전거 때문에 영화 내내 절망과 희망의 롤러코스터를 타곤한다. 전당포에 저당 잡혔던 자전거를 찾는 듯 하더니 첫 출근 날 도둑을 맞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도둑을 찾아도 자전거는 찾을 수 없다. 몇 번의 고심 끝에 남의 자전거를 훔치긴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붙잡히고 마는 리치는 절망 그 자체이다. 그래도 영화는 내내 희망을 놓치지 않고 얘기한다. 전당포에서 자전거를 돌려받고 직장에 들렸던 리치는 아내에게 앞으로의 수입을 나열하며 엄마에게 자랑하는 아이처럼 맑은 얼굴로 끊임 없이 얘기한다. 게다가 출근 전 아들 브루노와 자전거를 닦는 모습이며, 의기양양해 하는 아들 브로노의 모습, 새벽에 자전거 앞자리에 아들을 태우고 함께 집을 나서는 리치의 얼굴도 행복감으로 가득하다. 결국 자전거를 도둑 맞았을 때에도 ‘피데스 프레임’이라며, 연신 자신의 자전거 브랜드를 외쳐대면서 다 같이 시장을 누비는 와중에도 마치 찾을 수 있단 희망은 꼭 쥐고 있는 듯 보인다. 어디 그 뿐인가, 자전거를 찾다 지쳐 식당에서 브루노와 모짜렐라 샌드위치를 먹으며 잠깐의 여유를 가질 때도 리치는 희망을 갈구한다.


 하지만 리치에게 결국 희망은 오지 않는다. 어쩌면 처음부터 희망은 없는 듯하다. 일거리를 받았을 때부터 리치에게 자전거는 없었다. 자전거를 돌려 받긴 했어도, 댓가로 다시 저당 잡힌 침대보는 다신 되돌려 받을 수 없는 듯 몇 개의 선반을 밟고 올라야 다다를 수 있는 높은 곳에 보관되었다. 도둑과 아는 듯 했던 할아버지는 교회에서 밥이나 얻어 먹을 심산인 부랑자 중 한 명이었고, 우여곡절 끝에 도둑을 잡았는데도 자전거는 커녕 사람들의 비난만 받고서 도망치듯 거리로 나섰다. 이토록 절절한 리치가 결국 피해자에서 자전거 도둑이 되어버리는 순간, 우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그저 할 말을 잃게 된다. 그의 선택이 선이 되었든 악이 되었든 전쟁이, 사회가 만들어 버린 그의 비뚤어진 희망에 대한 집착은 결국 그렇게 좌절된다. 절망이다.


무기력한 사회, 무관심한 사람들


 리치는 끝없이 노력한다. 자전거를 찾기 위해서. 포스터를 붙이는 와중에 자전거를 도둑 맞는 리치는 전속력으로 달리는 자전거를 뒤쫓으며 ‘도둑이에요!’를 연신 외치지만 사람들은 뒤쫓기는 커녕 무시한다. 그 중에 한 명이 함께 달려와 주기는 하지만 그 또한 도둑과 한 패일 뿐이다. 자전거를 찾겠단 희망 하나로 경찰서로 향하는 리치. 하지만 거기서도 사람들의 무관심은 별반 차이가 없다. 접수는 됐으니 도둑을 잡아주기는 커녕 스스로 찾아보라 종용하는 형사와 더불어 그 뒤로 종종 나오는 경찰들은 하나같이 무기력하고, 방어적인 모습이다. 경찰임에도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닌, 상황이 불리하단 조언을 일삼는다. 어처구니가 없다.


 지독하게도 사회는 리치에게 냉담하다. 아내가 점집에 들렸을 때, 잠시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맡기는 순간마저 아이들은 놀이가 더 중요한 듯 보인다. 도둑은 조를 나눠 자전거를 훔치고, 자전거를 함께 찾자고 호기롭게 말하던 친구도 정작 자전거를 찾을 땐 뒷짐 진 채 목소리만 클 뿐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점쟁이를 찾아가보지만 이마저도 소용없다. “엄마가 허리 아프시죠?”와 같은 뻔하디 뻔한 말만 늘어놓곤 돈을 채간다. 돈만 더 잃었다. 리치가 자전거를 훔쳤을 땐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리치를 잡고야 만다. 리치가 자전거를 도난 당했을 댄 멍하니 강 건너 불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돌변한다. 리치는 철저히 당하고야 만다.


 으레 모든 시대가 그러하듯 전쟁은 많은 것들을 남긴다. 폐허가 된 사회를 다시 재건하기 위해 많은 이들의 희생은 당연시된다. 부르주아들은 상관없는, 실업과 가난, 그에 따른 범죄는 사람을 생각지도 못하는 상태로 바꾼다. 특히 예전부터 희생되어진 하층민들에게는 더더욱. 실로 그 시절 이탈리아에서 자전거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자전거는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닌, 새 삶을 살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이토록 소중한 자전거를 서로 뺏고 뺏기는 전쟁은 하층민들끼리의 리그였다. 상류층 사람들은 그저 자동차를 타면 그만이다. 직업을 얻기 위해서, 실직을 면하기 위해서 그들은 치열하게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노동에 대한 집회는 매번 열리지만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그저 자전거 패달 위에 내 두 발이 올려져 있으면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브루노의 등 뒤로 모짜렐라 샌드위치만이 아닌 다른 음식들을 배불리 먹던 아이의 표정이 우월해 보이는 것은 어쩌면 브루노보다 리치에게 더 크게 와닿았을 것이다.


 기어코 도둑을 잡았으나 현실은 어떠한가? 바뀌지 않는다. 도둑이나 리치나 별반 차이가 없다. 가난한데다, 간질 환자에 이미 자전거를 팔아버려 확실한 물증마저 없다. 더군다나 주민들은 가짜 알리바이까지 제공하며 도둑을 두둔하는 바람에 리치는 자전거를 되찾을 길이 없다. 너도나도 같은 상황에서 힘들게 사는 마당에, 리치는 포기한 듯 축 처진 어깨로 거리로 나온다. 이토록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사회에 지쳐버린 듯 리치는 곧 울 듯한 얼굴이다. 잔인하리만큼 부조리한 현실에서 철저히 혼자인 모습으로.



 자전거 도둑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 The Bicycle Thief>은 대표적인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다. 영화 속 로마는 날 것에 가까운 모습 그대로 난잡하다. 페인트가 떨어져 나간 빛 바랜 건물들과 황폐화된 거리 곳곳엔 전쟁 때 만들어졌다 철거되지 못한 철조망과 무너진 벽돌들이 즐비하다. 트램과 버스는 사람들로 가득가득하고 그 곳에서 질서란 찾아볼 수 없다. 벽엔 갖가지 선전용 포스터 위로 새로운 광고 포스터들이 덕지덕지 붙여지고, 활기가 넘쳐야 할 시장은 경쟁의 최전선에 나온 이들마냥 언성만 높다. “거리와 참호와 기차역으로 나가라. 오직 거기에서만 (새로운) 이탈리아 영화가 태어날 수 있다.”라 말했던 레오 롱가네시처럼 <자전거 도둑> 속 로마는 전후 모습을 잘 나타낸 세트처럼 보여진다. 그래서 더욱 리얼 real 하고, 리얼해서 더욱 서글프다.


 극 중 리치 역에 ‘람베르토 마지오라니’와 브루노 역에 ‘엔조 스타이올라’는 비전문 배우이다. 실제로 ‘람베르토 마지오라니’는 기계공이었고, ‘엔조 스타이올라’는 로마의 신문 배달부였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 두 사람의 연기는 그 시절 하층민의 모습 그대로인양 더욱 리얼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다큐멘터리처럼 이 두 사람을 쫓는 카메라는 있는 그대로의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본다. 인물이 중앙에 있는데도 거리 곳곳 또한 눈에 들어오는 이유로 그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인위적이지 않은 연출과 그 시대를 고스란히 담으려는 노력이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그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들 또한 그러하다. <자전거 도둑>은 특별한 내러티브가 없다. 앞서 계속 언급했지만, 리치가 자전거를 도둑 맞고, 다시금 도둑질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이 단순한 이야기에 분량적으로 살이 붙는 내용은 순전히 모두 우연적으로 생기는 어떠한 에피소드들이다. 이는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들의 드라마틱한 내러티브에 대한 강한 회피로 비춰진다. 리치가 겪는 에피소드에는 MSG가 없다. 그저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일이나 사람들일 뿐이다. 리치가 손수 겪게 되는 일은 자전거를 잃는 것, 자전거를 훔치는 것이 전부다. 이러한 연출은 영화를 보다 리얼하게 만든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사람들은 다큐멘터리 또한 연출의 산물인 줄 알면서도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이라 믿는다. 이 영화 또한 그런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아버지와 아들


 영화는 내내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지극히 평범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리치가 가난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앞에서 자전거를 잃고, 결국 타인의 자전거를 훔치는 과정에서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잣대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든다. 자전거를 도둑 맞은 리치가, 그의 자전거를 훔쳐 달아난 도둑과 똑같은 ‘자전거 도둑’이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선과 악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옳고 그름이 그들에게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답을 내릴 수가 없다.


 리치는 결국 절망한다. 그는 처음부터 그랬듯이 여전히 자전거가 없다. 더불어 저당 잡혀 침대보마저 없는 침대에서 매일 아침 일어날 것이다. 자전거가 없으니 벽보도 붙일 수 없어 다시 실업자가 되었고, 다른 일자리 또한 쉽사리 얻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리치에겐 브루노가 있다.


 영화는 내내 브루노의 얼굴을 크로즈업한다. 브루노는 리치의 희망이다. 자전거를 잃어 온 몸에 힘이 빠진 리치의 곁엔 언제나 천진난만한 브루노가 있다. 좌절한 아버지의 마음을 모두 헤아릴 순 없지만 브루노는 오줌이 마려운 것을 참고서 아버지와 함께 동행할 만큼, 리치의 순간적인 손찌검에도 이내 곧 용서할 만큼, 보도에 주저 앉은 아버지 곁을 얌전히 지킬 만큼, 브루노는 리치를 존경하고 이해한다. 리치가 자전거를 훔쳐 달아나다 잡혔을 때도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고서, 그의 모자에 묻은 먼지를 소중히 털어내던 브루노는 그런 아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과 절망감으로 눈물을 흘리는 리치와 그런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브루노.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오히려 성난 군중에게 온갖 멸시와 모욕을 받고서 걸어가는 두 사람. 모든 것을 잃어버린 두 사람의 뒷모습 위로 올려지는 FINE이란 글씨 뒤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을 리치 부자와 많은 사람들의 표정이 궁금했다. 이제 더 이상 자전거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리치와 브루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투명하고 어둑어둑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찬 얼굴로 걸어가고 있을까. 해가 저무는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자전거가 없어 절망의 늪으로 들어가는 모습일까, 새로운 태양으로 향하는 걸음걸음일까. 뭐가 됐든 리치는 살아갈 것이다. 그에겐 자신의 손을 놓지 않는, 아니, 놓을 수 없는 어린 브루노가 있다. 삶을 그대로 놓지 못하는 이유가 손에 들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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