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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뱅디 Sep 10. 2024

엄마가 떠나고 굿을 했다

남겨진 자들을 위한, 망자를 향한 굿

귀양풀이: 제주도 지역에서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집에서 벌이는 의례. 장사를 지낸 당일 저녁 사람이 죽은 장소를 신앙적으로 정결하게 하고자 행하는 무속의례. 죽은 이의 유감을 달래고 죽은 사람의 의사를 들어보고 묘지나 죽은 다음에 남기고 싶은 말을 듣는 시간.
- [출처]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엄마의 장례식이 끝났다. 절차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정신없는 사이 갑자기 굿을 하러 간단다. 정확한 굿의 이름은 기억이 안난다. 말 한 마디 못 하고 떠나자 망자의 유언을 대신 해주는 굿이 있단다. 일명 귀양풀이. 이모들이 먼저 간 언니의 마지막 남은 말을 그렇게나마 듣고 싶어 아빠에게 부탁했던 것 같다. 숫자, 사실관계, 과학적 근거를 매우 중요시 여기는 아빠는 그런 것을 믿지도 않고, 좋아할리도 없는데 엄마에 대한 죄책감, 이모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무당을 찾아서 굿을 예약했다.


그래서 엄마를 묻은 날, 이모들 4명과 아빠, 나, 동생은 무당집을 찾아갔다.


생전 처음이었다. 무당집을 간 것도, 굿판을 눈 앞에서 본 것도. 신기한 광경이었을테지만 많은 것이 기억나진 않는다. 무당이 음식을 바친 후 화려한 옷을 입고 몇 십 분 동안 무당춤을 췄던 것도 같다. 옆에 북치는 사람도 있었고, 도우미도 있었던 것 같다. 춤이 끝나고 무당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안 좋았다는 것을 누군가가 무당에게 얘기했을리가 없다. 하지만 무당은 엄마가 아빠의 모든 것을 용서한다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큰 딸인 나보고는 가방끈이 길 것이라고 했다. 훗날 나는 실제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공이긴 했지만, 어쨌든 내가 이 집안에서 엄마 다음으로 가방끈이 길어졌다.


작은 딸인 동생은 좋은 대학에 갈 것이라고 했다. 당시 고3, 5월.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동생은 엄마 장례를 치르고도 내신도, 수능도 계속 잘 봤고 실제로 좋은 대학에 갔다.


엄마는 아빠를 용서했고, 미련없이 떠난다고 했다. 새로운 여자를 보내줄 것이라고도 했다. 무려 딸들이 좋아할만한 여자로. …응?



엄마가 아빠에게 새로운 여자를 보내준다고?


아니, 엄마가 얼마나 대인배이길래 아빠에게 새로운 여자를 보내준다니? 쿨한 사람인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쿨했나? 게다가 남은 딸들이 좋아할 만한 새로운 여자는 또 어디있다고?

말이 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뒤에 앉아있던 이모들이 마음이 좋았을리 없다. 비꼬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고, 형부는 좋겠네. 새로운 여자도 들어오고.


아빠는 분노했다. 비싼 돈 주고 굿을 했더니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화를 내면서 건물 밖으로 나가버렸다.


동생은 아빠 보란듯이 오열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정말 새로운 여자를 만나면 죄책감으로 짓눌러버리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울음소리였다. 같은 딸 입장에서, "얘 왜이래" 싶을 정도였다.


나는 그저 어벙벙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어차피 아빠가 새로운 여자랑 살게될지 언정 진정 우리가 마음에 들 “새엄마”는 없다고. 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에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아빠에게 있을지 모를 새로운 삶을 내 멋대로 차단했다.



1년 뒤, 정말 아빠에게 새 동거인이 생겼다


그 미지의 새로운 여자는 1년 뒤에 나타났다.

웃기게도 아빠의 여동생이자, 우리의 큰고모였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얼마 뒤, 큰고모는 이혼하고 자식 둘과 함께 우리 제주도 집에 들어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평범하지 않았던 이혼 과정 속에서 온 가족이 정신 없던 나머지, 당시에는 무당의 이야기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었다. 그 이후로 몇 년이 지나서야, 문득 생각이 났다.

엄마가 아빠에게 새로운 여자를 보내줄 것이라고 했다. 무려 딸들이 좋아할만한 여자로.

아, 큰고모다. 엄마가 큰고모를 보내줬다.


사실 큰고모는 폭력적이고 무능력한 남편으로 아슬아슬한 결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엄마는 큰고모가 결혼할 때부터 그 사람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엄마라면 이혼하는게 당연히 큰고모를 위한 삶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는 신기하게 아빠랑은 사이가 안 좋아도 고모들이랑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엄마는 이모들에게 남편 뒷담화는 할지 언정, 시누이들은 착하다고 칭찬을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동생에게도 아빠는 나쁜 남편일지 언정, 고모들은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었다.


아, 정말 엄마는 딸들이 좋아할만한 여자를 아빠에게 보내주었다. 그 무당, 용하다!


그렇게 아빠는 경제력을 제공하고, 고모는 집안일을 제공하는 악어와 악어새 같은 공생 관계로 지내고 계신다. 사실 아빠를 아는 사람들은 다들 안다. 아빠의 성격을 감당할 여자는 세상에 많지 않다. 우리 고모는 너무나 대인배이면서도, 당신의 친오빠기에 잘 지내고 계신 것 같다.


이제 어느덧 같이 사신지 10년도 더 지났다. 고모 덕분에 아빠 집은 언제나 사람이 가득있다. 덕분에 나는 아빠가 잘 생활하는지 걱정이 되지 않는다. 홀아비로 제주도에 혼자 사시면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의 나라도 마음이 편하기 힘들 것 같다. 내가 서울에서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다.


딸들 없이 잘 지내고 있는 아빠도 고맙고,

아빠와 살아주는 고모도 고맙고,

집안의 정적을 채워주는 사촌동생들도 고맙다.

내 주위엔 모두 고마운 사람들 밖에 없다.




...그 무당, 사실 다시 찾아가보고 싶다. 아빠한테 어딘지 물어보면 혼날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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