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 5월 발간한 ‘디지털경제전망보고서 2024’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의 디지털 기술 도입률이 OECD 회원국 중 1위라고 합니다. 특히 기업 규모가 작더라도 빅데이터 분석, AI 등 신기술 도입에 있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달리 디지털화가 늦어지고 있는 산업이 있습니다. 바로 보험 산업인데요. 보험 산업은 가장 대표적인 ‘보수적인 산업’으로서, 디지털화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그 진행 속도는 매우 더딘 편입니다.
특히 다른 금융 업종과 비교했을 때 보험 업계의 디지털 전환이 늦어지고 있어 이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문제점들도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한국 보험산업의 디지털화가 왜 늦어지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직업 안정성 문제, 그리고 해외와 국내의 디지털화 사례들을 살펴보며 한국 보험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한국 보험산업의 디지털화가 느리게 진행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뿌리 깊은 전통적 구조와 복잡한 이해관계입니다. 보험업계는 오랜 기간 동안 설계사 중심의 대면 영업을 통해 성장해 왔기 때문에 이러한 구조는 산업 전반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설계사, 텔레마케터, 현장 영업소, 콜센터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얽혀있는 만큼, 디지털 전환을 통한 효율화 또한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면 보험사들은 물리적인 영업소와 대면 영업의 필요성을 줄이고, 비용 절감을 위해 조직을 재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설계사와 텔레마케터들의 역할이 줄어들고, 현장 영업소가 축소되거나 폐쇄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미 자동차보험이나 운전자보험의 경우, 대부분 온라인 비교를 통해 가입을 하는 경우가 보편화 된 상황입니다. 보험업계의 AI를 비롯한 디지털 기술의 도입은 결국 이들 직군의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이미 메리츠화재, KB손해보험, 한화손해보험 등 주요 보험사들이 30~40대 젊은 직원을 대상으로 대규모 희망퇴직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 한 HR테크기업의 조사에 따르면, 신입사원 평균 나이가 남성 29.4세, 여성 27.6세였는데, 메리츠화재의 경우 30세 이상부터 희망퇴직을 시행한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러한 조직 개편 움직임은 디지털화로 인한 업무 효율화와 조직 슬림화라는 명분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기존 보험업계 종사자들의 고용 불안정과 직업 안정성에 큰 위협이 되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가 한국 보험업계가 디지털화를 추진하는 데 있어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한국 보험업계가 젊은 직원들도 희망퇴직 대상에 포함되며 조직 개편에 속도를 내고 있는 가운데, 중국의 핑안보험의 디지털화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중국 보험업계의 만년 2위였던 핑안보험은 디지털화와 IT 인재의 적극적인 영입, 그리고 빅테크와의 협력을 통해 세계적인 보험사로 도약했습니다. 2018년에는 보험사 중 시가총액 세계 1위, 2020년에는 전체 금융회사 매출 세계 2위에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핑안보험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적극적인 디지털 기술 도입이었습니다. 정확도 99.8%에 달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안면인식 기술을 활용하여 설계사 채용부터 교육, 관리, 영업, 보험 계약 심사, 청구, CS 등 업무 프로세스 전반에 적극적으로 AI를 도입하여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추진했습니다.
둘째로는 중국 빅테크 기업인 알리바바와 텐센트와의 제휴와 협력입니다. 이들 기업은 함께 2013년 온라인 보험사인 중안보험을 설립하며 당시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보험과 IT의 결합을 선보였습니다. 이를 통해 AI와 빅데이터를 활용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여 기존 보험업계와의 차별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특히 중안보험에서 2015년 선보였던 혈당관리 보험상품인 ‘탕샤오베이’는 약 10년이 지난 지금봐도 꽤나 파격적인 보험상품이었습니다. 탕샤오베이는 가입자에게 스마트폰 형태의 혈당측정 단말기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혈당정보를 보험사에 전송합니다.
이후 혈당 호전 여부에 따라 갱신 보험료를 할인 혹은 할증하는 방식으로써, 주기적으로 혈당을 측정해 자가 관리가 잘 이뤄지는 가입자에게 보험금을 인센티브로 제공하고, 원격의료를 적용하여 혈당이 너무 높거나 낮으면 원하는 의사에게 상담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공 사례는 국내 보험업계에도 중요한 시사점이 있습니다. 단순히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산업과의 디지털 융합을 통해 새로운 시장 개척을 통한 시너지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한국 보험사들도 적극적으로 디지털화를 통한 새로운 수익 모델을 개발하고, 다양한 산업과의 협력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현재까지는 법적인 규제, 기대 이하였던 마이데이터 사업, 그리고 전통적인 구조와 복잡한 이해관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디지털 혁신을 통해 보험산업에 변화를 가져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인슈어테크 스타트업인 아이지넷의 '보닥'입니다. 보닥은 AI를 활용해 고객의 보험을 진단하고, 맞춤형 보험 상품을 추천하는 플랫폼입니다.
보닥의 성공 요인은 자체 개발한 AI 기술과 빅데이터를 활용한 진단 시스템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 고객이 가입한 보험이 적절한지 여부를 분석하고, 더 나은 상품을 추천함으로써 고객의 신뢰를 얻고 있으며, 기존 보험사와의 협력도 강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보닥이 주목받는 점은, AI 기반 보험 진단 및 추천 서비스를 통해 13개월 유지율 98%, 25개월 유지율 95%라는 매우 높은 계약 유지율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2019년 출시 이후 200만 건 이상의 다운로드와 누적 중개액 5000억 원, 매년 100%에 가까운 매출 성장을 기반으로 최근 사업모델 특례상장 방식을 통해 코스닥(KOSDAQ) 시장 상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보험업계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이제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보험산업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성공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기술 혁신과 함께 사회적 안정성을 고려한 전략적 접근이 요구됩니다.
전통적인 구조와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해 한국의 디지털 전환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결국 법적 규제 개선과 소비자들의 인식을 개선할 수 있는 다양한 전략을 실행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2022년 도입된 마이데이터 제도 이후 개선을 준비하고 있는 마이데이터 2.0이 보험 산업의 디지털 혁신의 핵심 동력 중 하나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API 기반으로 하나의 앱에서 본인의 모든 금융 현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마이데이터 제도는 시행 당시 혁신이라는 평가와 함께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보다 불편한 부분도 공존해왔었는데요.
이번에 금융위원회는 마이데이터 2.0과 관련하여 ‘사용자 편의성과 데이터 보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하고, 금융 마이데이터와 공공 마이데이터(의료, 공공분야 등)과 연계를 추진할 것’이라 밝혔으며, 이를 통해 보험사들이 더욱 효과적으로 디지털화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는 향후 한국 보험업계가 더 나은 미래를 그리는데 긍정적인 요소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기술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소비자들의 인식 개선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자동차보험이나 운전자보험의 경우 온라인으로 가입하는게 보편화되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실손보험이나 종신보험 등 장기간 납입을 해야하는 보험은 오프라인으로 설명을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온라인으로 가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실제로 그 결과 국내 디지털 보험사들의 경우 지난 해에만 약 2,300억의 순손실을 낸 것이 이러한 소비자 인식을 증명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해나간다면, 국내 보험 업계는 디지털 혁신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