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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캐처 Jun 10. 2024

마음 내킬 때만이라도 다정하기

나 스스로도 항상 그러기는 어렵고

여유가 없으면 각박해진다.



편하게 쉬고 싶은 소중한 주말이면 별 거 안해도 왠지 치이고 밀리는 인파로 부대끼는 서울도심 북적이는 곳을 좀처럼 안 가는데, 지난 주말에는 기한이 임박한 전시회 티켓 손실 방지차 부득이 가고 말았다.

걸음을 멈추는 곳마다 연달아 자리도 없는 카페들에 놀라고, 몇 바퀴를 돌고 이 층 저 층 거닐다가 앗! 자리 생겼다! 행운을 외치며 자리를 잡았는데, 하필이면 굉장히 날카로운 소음이 많은 공간이었다.


서울의 주말 카페는 이어폰이 필수구나 하면서 귀를 막았지만, 아주 큰 음량으로 듣지는 않다보니 주변을 쉴 틈없이 찌르고 울려대뾰족한 소리들은 귀에 콕콕 박혀서 점점 머리도 아픈 것 같고 불편한 시간이 내내 지속됐다.


다시는 안 오리라 절로 다짐하게 되는데, 옆 테이블에서 자리를 뜨려고 하는지 아이가 어머니께 거듭 혼나고 있었다.

 

아마도 한 번 말했는데, 빠르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은 모양인지 어머니 목소리에 살짝 짜증스러움이 흐른다.


아, 이런 남들 대화에 흘러다니는 뉘앙스 제발 캐치하고 싶지 않다. 나란 사람은 정말 다양한 분들과 더불어 아무렇지 않게 둥글게 살기 불편한 초난감 민감성이다.


나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도 않겠고, 매사 늘 다정하지는 못한 주제에 감히 아이나 약자에게 만큼은 좀 더 부드럽고 여리게 야들야들 사르르 녹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대하는 세상이 되길 바라다보니 불편 스위치가 조금 더 빠르게 켜지는 편인 것 같다.


나에게 직접 해코지를 안해도, 약한 사람 아이에게 쓸데없이 몸집을 부풀리고 눈을 크게 뜨고 무섭게 으르렁거리는 그런 분들을 조금 꺼려하는 편이다.


착하다는 단어가 조금 다른 의미로도 쓰여서 항상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를 둘러싼 세상이, 오가다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여유로워져서 착한 마음씨를 베풀면 좋겠다.



그런데 이미 너무 부대끼고, 치열하게 살고 밀리면 그 여유로움이 당연할 수 없는 것도 알아서 자연과 너무 멀리 떨어져 사는 죗값인가 싶기도 하다.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있는 군대스러운 회사생활도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서울생활도 굉장히 안 맞는 스타일, 온갖 것들이 귀에 다 들리고 보이니 쉽게 지치고 그걸 바꿀 용기나 나설 힘도 없으면서 제 풀에 피곤해지는 소수민족이 바로 나란 사람이다.



하루 지나 어제는 동네 어느 가게에 십 분쯤 대기하면서 한결 부드럽고 다정한 어머니와 딸의 웃음 곁들인 농담이 흐르는 대화를 들었다.


지켜본 것도 아니고 곁에 나란히 앉아 가끔 들리는 웃음과 음성에  내 마음까지 흐뭇해졌다. 확실히 좋은 에너지가 파동으로 이어지고 전해지는 모양이다.


지금은 과거형이라 특별히 기억나는 것도 없지만, 정보통신공학을 배울 때 교수님이 속사포로 내뱉으며 이런 게 있다고 넘어가는 와중에 몇 가지 파동 모양을 따라 그린 기억이 난다. 날카롭고 뾰족 뽀족한 엇갈리는 불협화음 말고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둥글둥글한 파동은 주변에 까지 널리 좋은 에너지 파장을 만드는 게 분명하다.


좋은 에너지를 만드는 사람은 또 어떻게 될 수 있는가?  내 경우는 일단 아프거나 배고프지 않아야 한다.


내 곁을 동글동글한 사람들로만 채울 수는 없다. 나 자신도 어떤 경우 매우 날카로워진다.


그래서 부단히 운동하고, 별 것 아닌 것도 거슬려보이지 않게 예방차원에서 잘 챙겨먹고, 틈 나는대로 다른 것을 보면서 걷고 쉰다.


상대방을 잘 받아주기 위해서, 버럭하는 사람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해 볼 여지를 내 안에서 직접 만들기 위해서, 나에게든 누구에게든 화내는 모습을 보고 나까지 따라하는 잘못된 선택은 하지 않으려고, 우선순위에 밀려 하찮게 내팽겨쳐진지 오래된 내 안의 이해심이라는 것의 주머니를 키워보려고 그렇게 하루 하루 애를 써보는 중이다. 


화를 버럭 내는 본능이라는 모드 스위치가 워낙 반응이 빠르다 보니 이렇게 내 감정을 한템포 쉬고, 거리를 멀리해서 보고 화를 내리고 침착해지도록 천천히 조절하는 것이 그리 쉽게 될리가 없다. 하루 아침에 되거나 태어날 때부터 가능한 사람도 없을테니 길게 보고 계속 신경써보는 나날이다.


꺼질 틈없이 불같이 일어나는 '화'가 많은 가정에서 꽤 오랫동안 살았고, 그 슬픈 역사를 홀로 입은 상처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간직한 나는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화 조절을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하는 1세대가 되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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