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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일러킴 May 10. 2021

생긴 대로 부잡스럽게 살기

절대 물러서지 않겠어!

 집 근처 페르시안 마트는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어 자주 들르는 식재료 가게다. 며칠 전에 가보니 매장 안은 손님들로 북적인 데다가 진열대 위치가 바뀌어서 찬거리를 찾는데 애를 먹었다. 정신없는 가운데 값을 치르려고 계산대 위에 물건을 올리는데 계산원이 말을 건넸다. ‘Hi’도 했고, 비닐봉지는 필요 없다고 했고, 영수증 달라고도 했고, 마트에서 필요한 영어 3가지는 끝낸 후여서 별 의미는 없으려니 했다. 좋지 않은 버릇임을 알면서도 못 알아들었을 때는 웃음으로 얼버무리게 된다. 마스크로 인하여 드러나지 않는 입모양까지 고려하여 가늘고 작은 눈을 한껏 반달로 만들어 웃음을 연출했다. 이렇게 까지 했는데 계산원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계산원은 젊은 여성이었는데, 입을 꾹 다물고 온 몸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무슨 실수를 한 것이 있나 싶어서, ‘Excuse me?’라고 물었다. 계산원 역시 마스크를 썼고 워낙 말이 빨라서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계산 수단에 대한 질문에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 것에 대하여 화가 난 것 같았다. 신용카드를 보여주기만 하면 계산원이 알아서 카드 단말기를 활성화했던 터라 그것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다. 계산원이 ‘너는 나를 무시했어’라고 하자, 나는 당황하여 ‘I'm sorry’라고 사과를 했지만 이미 감정이 상한 그녀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이야기하니, 그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캐나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쟤가 나를 깔보나?’ 혹은 ‘쟤는 왜 저렇게 거만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엊그제, 둘째 딸의 울먹임이 떠올랐다. 사회시간에 조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같은 조 친구들이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 다고 했다. 속상해하면서 지우개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한 친구가 ‘너 우리 조 소개해볼래?’라고 제안을 했단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그 친구가 다른 아이에게 조 소개를 넘겼다고 했다.


 이제야 그 상황이 이해가 됐다. 캐나다 아이들에게 조별 프로젝트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조원들 눈에는 지우개만 만지작거리는 둘째 딸이 의욕 부족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조 소개를 제안했는데, ‘OK!’ 혹은 ‘Sure’ 등 대답이 없으니, ‘얘는 조 소개도 하기 싫구나.’로 해석 하지 않았을까.


 경거망동을 삼가야 하고, 겸손하고, 양보가 미덕인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우리에게 욕구와 감정, 의사를 즉각적으로 표출하는 것이 당연한 캐나다 문화는 아직 버겁다. 영어가 안 돼 말이 입 안에서만 맴돌고 스스로를 바보 같다고 자책하니 더욱 주눅이 든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보는 것에 더하여, 무례하고, 건방진 사람 취급까지 받고 나니 이래저래 난감하다.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 ‘부잡스럽다’는 꾸중을 많이 들었다. ‘호기심 많고, 수시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에너지 넘쳤던 나’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서두르면 실수가 나게 마련이다. ‘부잡스럽다’는 지적은 경솔한 행동 때문에 비호감 낙인이 찍히지 않게 하려는 어른들의 배려였을 것이다. 천둥벌거숭이 어린이는 외향적이고 능동적인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누군가 ‘적극적’이라고 칭찬하면 ‘혹시 그만 좀 설치라는 뜻인가?’라고 곡해하고, ‘성격이 참 활발하세요.’라는 의례적인 인사에도 과하게 손사래를 치며 ‘겉으론 그래 보이는데, 은근히 낯을 가려요.’라며 극구 부인을 했다. 엉덩이가 들썩거릴 만큼 나대고 싶으면서도, ‘주제도 모르고 날뛴다.’는 험담이 들리는 것 같아 참아야 했다.

 

 나서고 싶고, 뽐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죄가 없다. 불안과 결탁하지 않은 순수한 욕구는 자연스러운 본성인데, 타인의 잣대를 들이대니 수치스러운 흉물로 느껴졌다. 들키지 않으려고 숨겨봤지만, 감춰지지 않았다. 공상 속에서 그려낸 대단한 나로 볼품없는 욕구를 덮었지만, 잠시 가릴 수는 있어도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남의 나라, 그것도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드러내야 하는 사회에서 위축되지 않으려면 기합이 필요하다. 기합을 넣으려면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올린 후 포효하듯 샤우팅을 해야 하는데, 에너지를 감추려만 했던 터라 갈피를 못 잡겠다. ‘부잡스러운 나’의 존재를 소환고 싶지만 걱정이 밀려온다. 텐션 조절 못하고 분위기에 휩쓸릴까 봐, 오버하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욕먹을까 봐 두렵다. 이래저래 겁 많은 영혼이다. 이젠 이런 반복된 갈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인생이 뭐 별것 있나. 타인은 무한대인데, 언제까지 무한개 눈동자의 인질로 잡혀 있을 것인가.   


아, 됐고, 이제부터라도 생긴 대로 부잡스럽게 살란다.

Never back 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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