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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일러킴 May 28. 2021

마음의 위축은 그만

나는 더 이상 찌질한 초딩이 아니다.

나를 망가뜨리는 건 쉽다. 지속적으로 허물을 들추면 된다. 허물을 들춘 상대를 향한 분노와 자기 비하가 몇 차례 반복되다가 멘탈이 무너지고, 위축된 마음은 방구석 은신처를 찾아 도망친다. 의식 상태가 안 좋을 때는 이대로 서서히 소멸되길 바란 적도 있다. 어리석은 생각이란 걸 알지만, 위축된 마음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이런 패턴이 생긴 원인은 있다. 나는 눈치 없는 어린이였다. 나만 만족하면 주변 신경은 쓰지 않았다. 일부러 무신경했다기보다는, 어떤 행동이 호감을 얻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지 구별하지 못했다. 미움받고 싶은 아이는 없을 것이다. 딴에는 잘하는 것을 드러내면 어른들에게 예쁨 받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잴 줄도 몰랐다. 뭐든 나서대니, 또래 사이에서 밉상이었을 것이다. Y는 그런 나를 특히 얄미워했다.   

  

Y와 나의 악연은 꽤 질기다. Y와 나는 아파트의 한 동에 살았고,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다. 한 반이었던 적도 여러 번이다. Y는 천지분간 못하고 날뛰는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나는 Y보다 머리 하나 더 있었지만 Y의 그런 시선 앞에 작아졌다. Y는 나의 허물을 기가 막히게 찾아냈고, 앞에서든 뒤에서는 사정없이 지적했다. 그렇다고 잠자코 당할 나는 아니었다. Y가 아니꼽게 나오면 대거리로 응수했지만 본전도 못 찾곤 했다. 35년이 지났어도 같잖아하던 Y의 표정은 생생하다.     

 

한 번 박힌 인상은 만회가 쉽지 않다. 초, 중, 고등학교가 아파트촌에 있었기 때문에 동네 친구가 곧 학교 친구였고, 초딩 시절 낙인찍힌 비호감 이미지는 이어졌다. 흑역사를 지우기 위해 상급학교로 진학을 할 때마다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의 환심을 사고 싶었지만, 같은 교복을 입은 Y를 마주칠 때마다 나는 다시 ‘찌질이 초딩’으로 돌아갔다. 학창 시절 내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캠페인을 벌였으나 별 효과는 없었다.    

  

성인이 되어 예전의 내 모습을 전혀 모르는 이들과 섞여 살아도 과거의 그늘에 갇혀있었다. 왜곡된 인지 패턴의 정상화가 이렇게 어렵다. 환경과 내가 바뀌어도, 불안해질 때마다, Y를 마주칠 때 그랬듯이, 다시 ‘찌질이 초딩’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타인이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꽁꽁 싸맬수록 세상에 광고를 하는 셈이 된다. “동네 사람들! 이게 바로 제 약점이에요! 이것만 들추면 저는 한방에 무너져요!” 사람들은, 귀신처럼, 안다. 어떻게 하면 타인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 “거기, 뭘 감춘 거야?” 툭, 건들기만 해도 지레 겁먹고 “저,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라고 자폭하는 나다. 아니긴. 실은, 그런 사람 맞다. 아니,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맞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그 아이, Y와 다시 마주쳤기 때문이다.

25년 만에.

캐나다 밴쿠버.

그것도, 동네 운동장에서.     



보통의 아침처럼 트랙을 뛰고 있었다. 7바퀴째. 가쁜 숨을 내쉬다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기분이 들어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중년 여성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성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알았다. Y였다. 모르는 척 하고 달렸다.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면서 ‘찌질이 초딩’이 꿈틀거렸다. 반대쪽 트렉에서 용기를 내어 Y를 다시 봤다. 멀리 Y가 일행과 허둥지둥 자리를 뜨고 있었다. 당황했나 보다. 당황? Y가 왜? 달리는 나를 흘끔거리고 손가락질하고 귓속말하며 깔깔거리며 비웃지 않고, 왜 자리를 옮겼을까? 피해야 할 사람은 나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Y가 가여워졌다. 과거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사람이 나뿐은 아니었나 보다. 물론 단순하게 나와 마주친 것이 불쾌해서 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가여운 건 마찬가지다. 사라지는 Y의 등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Y야.
현재는 2021년이고, 여긴 대한민국이 아닌데.
너와 나는 그 옛날의 초딩이 아닌데, 왜 그렇게 떠났니.
그 시절 나는 미성숙해서 널 불편하게 했었어.
미안해.
그러니 너도 이젠 좀 편해지길 바라.     


누군가 나를 오해했다고 해서, ‘나는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이해받고 싶어 안간힘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 그는 과연 ‘나’만 오해했을까? 그가 오해한 건 자기 자신 아니었을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은, 스스로는 물론, 세상을 왜곡하지 않는다. 오해하지 않는다. 그러니 심을 몰라준다고 억울해할 이유가 없다. 그건 그 사람의 몫이다. 타인이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니, 누군가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나의 오해였던 것 같다. 타인은, 세상은, 나만 오해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자기 가던 길 가기도 바쁘다. 위축된 마음이 만든 허상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운동장에서 마주친 Y도 성장을 멈춘 내면 아이가 만들어낸 환영 아니었을까. 진짜 Y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덕분에 습관처럼 반복된 ‘찌질한 초딩’의 실체가 드러났으니. Y가 새삼 고맙다. 이젠 그 ‘찌질한 초딩’ 좀 그만 좀 괴롭혀야겠다.     

찌질한 초딩 아니야.
제법 귀여운 구석도 있었어.
중요한 스포 알려줄게.
나중에 제법 괜찮은 어른으로 자란단다.
그러니, 이젠 기 좀 펴도 돼.
나는 더 이상 찌질한 초딩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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