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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ventud Nov 28. 2016

홀로 떠나고픈 당신에게

-제주 드림-



준비했던 한 단락이 마무리됐다. 한동안 날씨 좋은 날 궂은날, 평일 주말 없이 도서관을 오갔다. 매일 아침 맨얼굴에 머리만 질끈 묶고 어제와 비슷한 옷을 입고 오로지 하나만 생각하고 그 밖의 유혹을 다 뿌리쳤다. 불안과 다독임을 반복하며 다 끝내고 나면 제주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쉬다 오리라고 다시 힘을 얻기도 했다.








진짜 힘은 당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극복하는데서 나온다.








그렇게 다시 제주에 왔다.




브런치를 하면서 포스팅한 글에 대한 유입 키워드를 보게 되는데 요즘 들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 제주"라는 키워드를 검색한다. 실제로 제주 여행길에서 만난 대부분의 (친구와 함께 온) 남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주에 혼자서 여행 오시는 줄 몰랐어요. 저도 다음엔 꼭 한번 혼자 와 보고 싶어요."

의외로 혼자 여행 온 여자들은 많다. 연령대도 다양하다. 대부분은 처음 혼자 와서 아무것도 준비 못하고 어디갈지 계획도 못했다고 하는데, 이게 맞는 건가 하는 표정이다. 그게 맞다. 처음엔 다 모르고 온다. 모르고 와서 살짝 맛만 봐도 채워지는 것이 있고 '다음엔 이렇게 해야지 저기도 가야지' 하는 아쉬운 마음에 또 한 번의 혼자 제주 여행을 기약하게 된다.



첫사랑, 아니고 첫제주


일기예보를 보면 오늘 제주 날씨는 서울보다 기온은 높았지만(7-9도) 바람이 많이 불어 체감온도는 서울만큼, 어쩌면 서울보다 춥게 느껴질 거 같아서 두터운 후드에 겨울 오리털 패딩을 껴입고 왔다. 아니나 다를까 비행기에서 내려 항공사 버스를 옮겨 타는데 쌀쌀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두껍게 입고 오길 잘했다. 평일이고 비수기(초겨울)였기 때문에 조금은 한산한 제주를 상상했는데, 김포공항에도 주말처럼 사람이 북적였고, 제주 공항도 적지 않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서둘러 숙소로 가는 100번 버스에 올라탔다. 


겨울의 문턱에 선 이 절기의 어둠은 성큼 찾아와 밤을 일찍 불러온다.  








원래 옆에서 코를 골아도 웬만하면 단잠을 자는 편인데 그날 밤은 왜 인지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선잠을 자다 일찌감치 일어나 준비를 하고 1층 로비에서 토스트를 먹으며 오늘 일정을 정리해봤다.



'오전엔 선흘에 있는 카페에서 글을 쓰고 오후엔 산굼부리에 가야지' 



길 찾기로 검색해 보니 버스터미널 뒤쪽에 선흘로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다고 나왔다. 그런데 지도상 위치로 가보니 버스가 지나다니는 비주얼이 아니다. 지나가다 보이는 기사님께 물어보니 선흘로 바로 가는 버스는 없단다. 그럴 리가 없다. 그때까지는 길 찾기 결과를 맹신했다. 또 다른 아저씨께 물으니 바로 가는 버스는 없고 701번 타고 함덕 가서 990번으로 갈아타야 한다고 하셨다. 결국 길 찾기가 다 맞는 건 아니었다. 701번 버스에 오르며 기사님께 선흘 가려면 함덕 가서 갈아타야 하냐고 다시 한번 확인차 물었다.



"그렇지 그렇지, 어찌 그리 잘 알아, 아가씨 제주 사람인 갑서" 



옆에 탄 아저씨는 나를 보고 선녀와 나무꾼 가나보다 하시고 기사님은 제주도 사람이지, 친척 보러 간다 하시며 웃으며 농담을 하셨다. 버스 출발시간이 남아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데 기사님이 핸드폰으로 찾아보시곤 환승버스 시간까지 알려주셨다. 환승버스가 11시 54분에 있으니 이거 타고 가면 딱 맞겠다고 친절히 알려주셨다. 제주에서는 간혹 놀랄 정도로 시크하고 호통치는 스타일의 기사님도 계시기에 친절한 기사님을 만날 때면 더욱 반갑다. 



20분 정도 달렸을까, 버스를 타러 갈 때만 해도 날씨가 흐렸었는데 창밖으로 펼쳐진 하늘과 바다는 청아한 푸르름과 시원스러운 파란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좋은 날씨에 바다를 가까이서 보지 않고 내륙으로 들어가기는 아깝다. 마침 버스를 함덕 서우봉 해변에서 갈아타야 했고 버스가 오기까지 30분이 남아있었다. 망설일 틈도 없이 이끌리듯이 해변으로 걸어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해도 위안이 되는 풍경. 지난번 왔을 땐 북적이던 델문도 카페도 주말과 달리 사람이 많지 않아 한적해 보였다. 파란 하늘과 바다를 아쉽게나마 눈에 담고, 11시 54분에 오는 982번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버스를 타고 10여분을 달려 드디어 선흘에 도착했다. 조용하고 한적한 제주의 작은 마을. 카페를 찾아서 지도에 나와있는 대로 "작은 부엌"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까만 돌담에 걸려있는 무심한 나무판자에 알록달록 채색된 삐뚤빼뚤한 나뭇가지로 명시된 작은 부엌의 간판이 눈에 띄었다. 



제주의 전통 가옥들이 그렇듯 그곳도 작고 아담한 집 세 동이 이 소박한 마당을 끌어안고 있었다. 이곳의 음식이 다 채식이라고 하니 왠지 정갈하고 깔끔한 맛일 것 같다. 카페를 가기 전에 한 그릇 하고 갈까 하다가 카페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레 들어선 골목 역시 아무도 없고 조용했다. 무심코 흥얼거리는 허밍소리마저 누군가에게 들릴 것 만 같은, 심지어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햇살만 가득한 마을. 




저 멀리 바람에 나부끼는 꽃 다홍 저고리가 보인다.  단아하게 여며진 y자 모양의 깃에는 하얀 레이스가 빛나고, 작은 들꽃 무늬가 붉은 저고리 전체에 소박하게 만개했다. 고운 손길로 단정하게 맨 고름, 그 아래로 자연스럽게 툭 떨어지는 치맛단이 바람에 몸을 맡긴 듯 살랑살랑거렸다. 






한복은 참 곱다. 몸매 라인을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그 자체로 여성스럽고, 그 자체로 단아하다. 늘 우리나라에서 한복을 잘 입지 않는 문화가 안타까웠다. 어렸을 때 기억에는 명절에라도 입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어색하다. 오히려 경복궁에서 한복을 입은 외국인 관광객이 더 많을 정도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요새 들어 부쩍 다양한 형식의 한복을 대여해서 사진을 찍고 관광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아졌다. 여기 선흘 집도 한복을 대여해 주는 곳인 듯했다. 구경해보고 싶어 안으로 들어갔다. 젊은 여자분 한분이 나오셨는데, 구경해도 되냐는 물음에 친절하게 안으로 안내해 주셨다. 이제 오픈한 지 한 달 된 따끈따끈한 한복대여점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도 좋아할 만한 개량된 디자인의 한복이 다양하게 걸려있었다. 누군가 사진을 찍어줄 만한 사람이 있다면 한번 꼭 입어보고 싶다. 다음에 왔을 때는 꼭 한번 입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지난 유럽여행에서 만났던 동생들이 생각났다. 쌍꺼풀이 없는 하얀 얼굴을 한 단짝 친구 둘이서 한 달 유럽여행을 왔다. 어려서부터 한복을 좋아했다는 이 기특한 아이들은 짐도 많은데 한복만큼은 구겨지지 않게 고이 담아 왔다. 전 세계인이 모이는 주요 도시나, 한국을 잘 모를법한 나라에서는 꼭 한번 한복을 입고 나간다고 했다. 정말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진 요청을 받고, 어쩌면 한국에서 평생 들은 것보다 더 많이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다는 말에 내가 다 뿌듯했다. 오히려 어린 친구들이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알리고 지켜가는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았다. 한복 유행은 앞으로 오래도록, 아니 유행이 아니라 이제는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고운걸






카페 세바를 찾아왔다는 내 말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환승까지 해가며 어렵게 온 길이라 휴무일까지 다 확인하고 왔는데, 아마 문을 닫았을 거라는 말. '아닐 거야.......' 바랬지만, 동네 도로 공사로 일주일간 임시휴업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기엔 너무 아쉽다. 선흘집에서 그나마 가까운 다른 카페를 소개해 주셨다. "가깝지만 걸어가긴엔 좀 멀고 차 타고 가시면 금방 가실 거예요" 거기까지 가는 버스를 찾거나 택시를 기다리다가는 날 샐 거 같아 일찌감치 차를 타는 것을 포기하고 걷기로 한다. 작은 부엌에서 배부터 채워야겠다. 



문을 열고 들어간 식당 내부는 정말 말 그대로 작은 부엌. 오픈된 작은 부엌 앞에 2인 테이블 하나, 4인 테이블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테이블 뒤로는 크게 창이 나서 작은 공간이 그다지 답답해 보이진 않았다. 테이블과 부엌 중간쯤에도 작은 창이 액자처럼 나 있다. 아담하니 혼자 온 여행객으로서는 정말 반가운 공간이다. 이미 먼저와 있던 사람들이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두계장국밥 하나를 시켰다. 메뉴 중에서 가장 가격이 합리적이고 혼자 먹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아 보였다. 연두색 두건을 머리에 두른 주인분께서 테이블의 작은 양초에 불을 켜주시고, 찻물을 따끈하게 데워서 갖다 주셨다. 찹찹했던 손이 따뜻해졌다. 











옆 테이블은 세 사람이 같이 와서 여러 가지 메뉴를 시킨 듯했다. 메뉴가 하나 나올 때마다 주인아주머니께서 어떤 재료를 썼고 어떻게 먹는 게 좋은지 알려주셨다. 본인이 만든 요리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기다림의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그 공간에 머무름이 좋았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국밥이 나왔다. 언뜻 보기에는 육개장과 비슷해 보였고, 보라색 식용꽃이 다소곳이 올라와 있었다. 나무 숟가락으로 한 숟갈 떠서 후후 불어 첫술을 떴다. 버섯육수를 쓰셨는지 감칠맛이 나고 시원하고 깔끔했다. 국 건더기를 걷어내니 속에 밥이 가득했는데, 밥은 씹을수록 고소했다. 누룽지 같은데 질감이 딱딱하지 않고 누룽지만큼 고소만 맛. 밥 자체가 맛있어서 배가 부른데도 그걸 다 먹었다. 신기하게도 이 국밥은 다 먹을 때까지 계속 연기가 모락모락 나게 뜨거웠다. 같이 곁들인 무절임은 그 어디서 먹은 것보다 시원했다. 뜨거운 국밥을 먹느라 화끈해진 입안에 탄산을 머금은 듯한 개운함. 한 그릇 배부르게 비우고 정말 맛있게 먹었다는 감사인사를 남기고 나왔다. 







들어갈 때 보지 못한 텃밭이 부엌 건물 옆으로 보였다. 가지런히 심어놓은 모양이 주인의 성품을 닮은 듯하다. 그 뒤쪽으로는 하얀 천 그늘 아래 흔들의자와 정겨운 학교 걸상도 보인다. 해도 잘 드는 것이 재미없는 책 보다 스르륵 잠들기에 딱 좋은 공간이다. 어쩜 저런 공간도 분위기 있게 꾸며놓으셨을까. 제주에는 참 예쁜 공간이 많다. 그리고 제주의 풍경이 그런 공간들이 다 어우러질 수 있게 포용한다.







지도를 보고 카페 동백을 찾아 나섰다. 제주에는 인도가 없는 도로가 많다. 그래도 작은 동네 차도라 차가 많지 않아 주위를 잘 살피며 걸어갔다. 쨍쨍한 해를 온몸으로 받으며 귤 농장을 지나 15-20여분 걸었다. 지도 위치상 카페로 가까워지는데도 도저히 이곳에는 카페가 있을 거 같진 않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저 멀리 건물 하나가 보인다. 웬 진돗개 한 마리가 나와서 인사를 하니 짖는다. '그래도 다가가면 더 짖진 않을 거야' 애써 두려움을 감추며 웃으면서 안녕~ 하는데 그래도 짖는다. 다가와서 나를 물진 않겠지, 잠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개가 따라오다가 또 짖으니 누군가 그 개의 이름을 부르는 듯했고, 자기 이름을 듣더니 쏜살같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전혀 카페가 있을 거 같지 않은 외딴곳에 떡하니 보란 듯이 나타났다. 카페 동백.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무도 없는 밖과는 다른 분위기가 펼쳐졌다. 아주 조용하지만도 그렇다고 시끄럽지도 않은 적당히 화기애애한 분위기. 넓은 통 창 밖으로는 아까 나를 보고 짖던 진돗개와 까만 개 한 마리가 여유롭게 뛰놀고 있었고,  그 옆 창문 밖은 황량한 초목 풍경이 보이는데 그 마저도 그림 같다. 볕을 쬔 듯한 건강한 피부색의 주인 여자분이 한쪽 귀에 커다란 깃털이 달린 귀걸이를 하고 넉넉한 앞치마를 두른채  고유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주문한 애플 시나몬 차가 나왔다. 계피향이 솔솔 나는 달큼하고 따끈한 맛, 찻잔 안에 애기사과가 조각조각 떠올랐다. 쓰고 싶었던 글을 적다가 이따금 창밖도 바라보며 들어가고 나가는 사람 구경도 하며 잠시나마 정오의 해가 기울어 해 그림자가 지는 오후 시간을 즐겼다. 시간이 3시에 가까워졌을 때 산굼부리로 가는 버스를 검색했다. 일정상 가능하면 오늘 오후에 산굼부리로 가야 했다. 제주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가 다음에 제주에 오면 꼭 산굼부리를 가보라고 했기에 억새가 만개한 해 질 녘의 풍경을 눈에 담고 싶었다. 



선흘에 오면서 길 찾기 서비스가 제주에서는 간혹 정확도가 떨어진다고 판단되어 서울의 다산콜센터 같은 제주안내 콜센터 "064-120"으로 전화했다. 버스를 이용하는 혼자 여행객은 시스템이 다른 제주의 버스 이용에 어려움을 느낄 때가 많다. 나 역시 제주를 적지 않게 왔는데도 아직까지도 제주 버스에 대해서는 물음표 투성이다. 그래도 이제까지는 주로 해변을 따라 비교적 알려진 곳으로 갔기 때문에 큰 어려움을 못 느꼈는데, 제주 내륙에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으로, 비교적 관광객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는 곳으로 찾아 들어오려다 보니 버스도 자주 없고 길 찾기 정보에도 오류가 있었다. 


제주 안내 콜센터는 가장 정확한 정보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갖은 검색과 콜센터와의 전화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제주에는 시외버스와 읍면 순환버스가 있다. 시외버스는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오가는 버스이며 비교적 자주 있다. 그런데 읍면 순환버스는 하루에 10-15회 있는 곳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버스가 하루 5회, 작게는 2회 오는 곳도 있었다. 미리 시간을 알고 동선 시간을 계산하지 않으면 몇 시간씩 버스를 기다려야 하거나,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경우에는 콜택시를 불러 생각지 못한 지출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택시는 출발지까지 가는데만 10분 이상 걸리기 때문에 미터기 요금이 아닌 추가 요금 제시한 적도 있었다.)



좀 더 순조로운 여행을 위해서는 길찾기 검색을 참고하되, 제일 정확한 방법은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하기 전에 기사님이나 매표소에서 경로를 묻거나, 이도 저도 여의치 않다면 제주 안내 콜센터로 전화해서 경로와 버스시간을 알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다행히 콜센터는 정말 친절하다:) 


3시 반에는 산굼부리로 향해야 하는데 우려했던 대로 적어도 그 시간대에는 버스가 없었다. 지도를 찾아보고 난 후 산굼부리까지는 택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다행히 산굼부리에서 시외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는 5시 10분, 5시 23분경에 있었다. 콜택시를 불러 타고 20여분을 달려 산굼부리에 도착했다. 오후 4시를 넘기니 바람이 제법 차가워졌다. 한 낮과는 사뭇 달라진 기온에 점퍼의 모자를 뒤집어썼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이국적인 풍경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산굼부리 :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오름

한국에서 하나뿐인 마르(maar)형의 분화구(마르형이란 용암이나 화산재의 분출 없이 열기의 폭발로 암석을 날려 구멍만이 남게 된 분화구를 말한다)이다. 굼부리는 화산체의 분화구를 가리키는 제주말이다. 제주의 풍광을 아름답게 담아낸 것으로 유명한 영화 「연풍연가」의 촬영지로 태고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오름이다. 천연기념물 제26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둘레가 2㎞가 넘고 깊이는 한라산의 백록담보다 17m나 더 깊어 132m에 이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굼부리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 1. 15., 마로니에북스)



찬바람에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지만 풍경만큼은 아름답다. 분화구가 보이는 곳으로 오르는 산책로에는 가을 억새가 만발이다. 지는 오후의 강렬한 햇빛을 받아 억새꽃이 푸슬푸슬 은빛으로 빛났다. 손이 시릴정도로 바람이 차가웠지만 바람이 부는 덕에 억새밭이 물결치듯 영화 같은 장면을 자아냈다. 





































노래가 없어도 노래가 되어 머릿속에 기억될 장면. 그냥 말없이 바라보고 걷는 것 만으로 좋았다. 차가운 공기는 깨끗한 물로 뽀득뽀득 씻어낸 빨래처럼 머릿속을 깨끗이 씻어냈다. 탈탈 털어내고, 깨끗하게 비워내니 이제 다시 채워 넣을 수 있겠다.






















 

산굼부리에 어스름이 깔릴 무렵, 시간 맞춰 버스가 도착했다. 따뜻한 버스에 올라타자 언 몸이 녹으니 잠이 몰려왔다. 한숨 푹 잤다. 퇴근시간에 맞물려 차가 막혀서 맘껏 졸아도 내릴 정거장을 지나치지 않을 만큼 푹 잤다. 버스터미널에서 환승해서도 다시 1시간여를  달려 숙소가 있는 곽지과물해변 정거장에 내렸다. 정거장 외에는 사방이 깜깜했다. 정녕 나는 홀로 이 어둠 속을 걸어가야 하는 것인가. 정말 가로등 하나 없는 길로 들어섰다. 무방비로 불안해하며 걷기보다 뛰는 것이 났겠다 싶어 어둠 속을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 숙소의 작은 불빛이 어둠 속에서 더 환하게 눈에 띄었다. 







숙소는 제주 전통가옥을 살짝 개조한 한 형태였다. 바닥에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고 난방기로 공기를 데우다 보니 난방기를 틀면 작은 방이 금세 너무 건조했고, 끄면 금세 또 코 끝이 시렸다. 샤워실도 한기가 가득했는데 씻는 사람이 몰려서 인지 졸졸졸 온순한 성품의 물줄기 덕에 추위에 떨며 느리게 씻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다른 건 마음에 들었지만 다만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겨울엔 절대 오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거실에는 꽤 보고 싶은 책이 많았다. 머리를 말리는 동안 전기장판을 켜서 침대를 따뜻하게 데워놓고 책 두어 권을 골라 들고 침대 안으로 쏙 들어왔다. 사람이 되게 간사한 게, 방금까지는 너무 추워서 괜히 왔다는 생각을 했는데, 코는 시려도 따뜻한 침대 속으로 들어와 책을 손에 쥐니 또 세상없이 행복했다. 감성 돋는 제주의 밤.



  

왜 인지 평소에 잘 보지 않는 류의 책을 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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