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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주봇 Jul 30. 2019

1. 사는 건 참으로 이름 따라간다

우당탕탕 셀프 웨딩

나의 이름에는 두루 주(周) 자가 들어간다.


몇 해고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정신없던 장례 일정을 마치고 아버지께서는 주말마다 어딘가를 그리 돌아다니셨다. 무엇이 그리 바쁘셨는고 하니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가족의 족보를 정리하셨더랬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이런 부분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분인 줄만 알았는데 - 어느 날 보무도 당당히 집에 들어오셔선 우리들을 앉혀놓으시고는 내가 무슨 파의 몇 대손이네, 우리 집안이 저 어그마에서 시작되었네 같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신나게 전해주셨다.


내가 임마 느그 고조 할배뻘이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어떤 어떤 항렬에 따르면 사실 내 원래 한자는 우뚝 솟을 주(柱)였다지 뭐람. (내 이름은 감사하게도 할아버지가 지어주셨는데 아버지는 아마도 할아버지께서 옥편을 찾다 조금 헷갈리신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하셨다.) 말미에는 원한다면 한자를 원래 뜻으로 바꾸어 사용해 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도 넌지시 건네주셨다.


생각해보겠노라고 방으로 돌아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신기하게도 나는 참말로 두루 주 처럼 살아왔다. 아직도 낯선 사람이 내게 뭐하는 사람인지 물어볼 때면 고민하곤 하는데... 음...


국민학교 무렵부터 미술공부를 해서 미대에 갔는데 2학년 때는 영화과를 선택했구요, 밴드를 하다가 줄곧 권총 차기 일수에 도망가듯 군대에 다녀오고선 군대에서 쓴 대본으로 연극도 연출도 해보고 자그마한 광고 프로덕션도 운영했었는데. 참! 인테리어를 좋아해 전기공사나 쎄멘 양생 즈음은 너끈하고요. 지금은 UI UX도 배우고 있는데 회사가 작아 회계나 세무 일도 하구요. 기술 스타트업에서 일해요.


내가 봐도 참 대중없고 난잡한 - 우뚝 솟는 것과는 거리가 먼 커리어인데 듣는 상대방은 어떻겠어. 여튼 나는 어린 시절보다는 두루두루 그저 그런 나를 점점 좋아하고 있다. 뭐 하나를 엄청 잘하는 건 아닌데 써먹을 데는 꽤 많은 그런 사람. 다음 날 조반상 앞에서 아버지께는 한자를 바꾸지 않겠노라고 말씀드렸다. 아부지, 저는 그저 그런 제가 참 좋아요.


그런데 사랑해 마지않는 와이프(가 될 사람)도 참으로 그리 살아왔더랬다. 법학과를 나와선 옷이 좋아 동대문 사입 시장에 들어갔고, 사진작가가 아파 결근을 한 틈을 타 어찌저찌하다 사진을 처음 찍었는데 이게 또 재밌는 거라. 그래도 이것저것 더 해보고 싶어 시계 회사에도 들어갔다가 주류 패키지 디자인도 했다가...


이야기가 잠깐 새버렸는데 어쨌든 우리는 그동안 서로를 그럭저럭 무얼 많이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었는데, 이번 기회에 그런 우리를 최대한 써먹어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두루두루 그럭저럭인 두 사람의 셀프-웨딩이 시작된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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