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생 아님. 나는 천재 작사가가 될 거야.
기계식 키보드를 샀다. '타닥타닥' 소리와 은은한 존재감의 백라이트까지, 해외직구로 3주 가까이 걸려 받게 된 새 친구가 꽤 만족스럽다. 택배를 받으면 제일 먼저 어떤 글을 쓸지 행복한 고민을 했었는데, 막상 키보드가 내 손에 들어오니 처음 품었던 의욕을 따르기 쉽지 않다.
환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 브랜드별로, 취향별로 비교하면서 키보드를 알아보는 동안 나는 상상 속에서 짧게나마 이름깨나 날리는 유명 작가가 되어있었다. 타건음에 취한 채 넘쳐나는 영감의 샘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가사를 써 내려가는 베스트셀링 작사가... 뭐 그런 상상마저 상상인 상상.
작사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9개월쯤 지나는 중이다. 작사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여러 학원들을 비교해 가며 몇 개월을 고민한 끝에 지금의 학원을 결정한 2022년의 여름. 비가 많이 내리던 날 밤, 압구정에서 친구와 산낙지에 소주를 마시면서 떨린다고 징징 거리다가 용기 내 첫 학원비를 입금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전공은커녕 일말의 관련 지식도 없는 상태로 처음 접한 음악과 작사의 세계는 말 그대로 신세계였다. 곡의 구조부터 각종 용어, 관련 업계 이야기 등 매주의 수업이 설렘 그 자체였다. 그리고 곧바로 마주한 실전은 그 이전과 아주 많이 달랐다.
불가마 사우나에 들어앉아 10초만 더... 20초만 더... 하며 나 자신과 싸우는 심정으로 매월 새로운 곡을 받고 시안을 쓴다. 희망만 품는 시간이 누적될수록 기운 빠지는 날이 잦지만, 그것보다 더 자주 으쌰으쌰 하며 나는 습관처럼 나를 격려한다. 데모 버전으로만 듣던 음원이 정식으로 발매되면 구성별로 속속들이 파헤치며 '이 가사가 왜 채택되었을까' 분석한다. 새로운 아티스트의 곡이 들어오면 그의 활동이나 SNS, 직전 앨범을 모니터링하며 새로운 앨범의 방향을 추측하고 캐릭터를 정의 내리곤 한다. 매일 습관처럼 음원 사이트에 들어가 HOT100에 들어있는 신곡들의 트렌드를 읽고 크레딧에 이름 올린 작사가들의 활동을 추가로 모니터링한다.
책상이나 가방, 노트북 어디든 갑자기 번뜩이는 생각을 끄적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두고, 드라마를 보다가, 웹툰을 보다가, 길을 걷다가 떠오르는 키워드를 메모장에 끄적인다. 새로운 데모가 들어오면 늘 호기롭게 덤벼들고, 장렬하게 패배한다. 매주 규칙적으로 선생님과 동기들에게 피드백을 요청하고, 이제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분들의 리뷰를 받는다. 그렇게 시간과 체력과 싸우면서 뜨겁다가도 맹숭맹숭한 꿈에 물을 주고 있다.
또 다른 장비발이 필요하다. 나는 결국에 마침내 기어코 천재 작사가가 되고야 말 거니까. 조만간엔 좋은 스피커를 하나 장만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