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맛'을 읽고
우연히 SNS를 돌아다니다가 '을의 맛'이라는 2013년 칼럼을 읽었다. 기자가 쓴 글인데 취재원들에게 기자는 '을'이라며 무한한 기다림으로 얻은 성과가 쭉 서술된다. 마지막은 을의 맛을 잊어간다는 배부른 나라를 꼬집었다. 약간 불편했다. 진심을 다하면 된다는 이야기지만 굳이 '을'의 입장을 꺼냈어야 했나 싶다. 을질 잘해서 갑이 된 그대여, 을의 맛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라니. 글의 말미를 장식하는 배부른 나라가 국민들을 얘기하는 건지, 높으신 분들을 얘기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을의 맛이라는 개념도 잘 와닿지는 않는다.
'을의 맛'을 안다고 쳐도 과연 갑이 되서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칼럼이 아쉬운 이유는 자신같은 을이 나오지 않길 바란다는 소회, 즉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점이다. "세상의 모든 갑은 을 시대의 분투기를 간직하고 있다." 을의 분투기가 얼마나 강렬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가 언급한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도 상하개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결국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느냐가 중요한 이슈일 것이다. 글의 마지막을 장식한 라면상무 이야기, 대리점 밀어내기 사례도 평등한 관계를 비뚤어지게 본 그들의 갑질이 왜 나왔는지를 먼저 봐야했던게 아닐까.
평등한 사회는 아직 구호일 뿐일지 모른다. 신(新)계급사회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갑과 을'이 암암리에 퍼져있는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를 또 다시 을로 낮추며 을의 자세를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을이 아니다. 문제는 자신만의 상하관계를 나누고 스스로 '갑의 맛'을 알아버린 이들이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계급을 설정하고 고통과 인내를 무조건적으로 요구하는 행위가 비일비재하다. 요즘의 젊은이들이 소위 '꼰대'라고 비꼬는 대상들이나 열정페이, 아프니까 청춘이다 등이 공허한 이유도 이 프레임 안에서 결코 멀지 않기 때문이다.
군대시절이 괴로운 이유는 아랫사람이라고 받는 불합리한 일들이 결국 시간이 지나야 해결된다는 점이다. 괴롭히는 선임이 전역을 하거나 아니면 소위 짬을 먹는 수밖에 없다. 사회생활도 다르지 않다. 아파도 얘기할 수 없고 괴로워도 버텨야 한다. 응당 그들이 '을'이라는 이유로 받는 대가이기 때문이다. 3년이 지난 지금 이 글이 불편한 이유는 여전히 갑이라는 불특정 다수의 횡포가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는 점이고 갑들의 문제의식은 너무나 가볍다는 점이다. 3년 뒤에는 달라질 수 있을까. 시간만이 을의 아픔을 해결할 수 있어서는 안 된다. 을의 맛은 오늘도 한없이 쓰디 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