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내 이름과 아이 이름의 영어 철자에 J가 들어간다. J는 우리가 ‘ㅈ’ 발음을 생각하고 사용하는 알파벳이지만 독일어의 알파벳에서는 ‘ㅇ’ 발음을 할 때 J를 사용한다. 가령 Jacke은 잠바, 겉옷이란 뜻의 독일어다. 영어식 알파벳에 익숙한 우리는 너무 자연스럽게 ‘자케’ 혹은 ‘잭’이라고 읽고 싶지만 ‘야케’라고 읽는 것이 독일어 발음에 가깝다. 진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영어 철자를 Jinju라고 쓴다면 독일인들은 '잉우'라고 읽을 것이다. 그래서 이름에 J를 가지고 있는 우리 이름은 우스꽝스럽게 불려지기 일쑤다.
병원이나 관공서, 학교에서 이름을 적어내면 이곳은 독일이니 독일식으로 부르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발음하기 불편하고 낯서니까 아예 처음부터 자기 맘대로 간단하게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크게 개의치 않고 간단하게 줄여서 혹은 그들이 부르기 편한 대로 부르라고 하는 편인데 아이는 다르다. 아이는 꼭 자기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기를 원한다.
4학년의 첫날을 보낸 아이가 “오늘도 선생님께 내 이름을 여러 번 가르쳐 드렸어.”라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이유를 물어봤더니 선생님이 자기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단다. "내 이름을 왜 제대로 안 불러 주는 거야."하고 투덜거리는 아이에게 "어려울 수도 있지." 하고 가볍게 대답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엄마, 내가 3학년 때 선생님을 좋아하는 이유가 뭔 지 알아?”
아이는 자기 얘기에 엄마가 호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는지 갑자기 작년 선생님 이야기를 꺼냈다.
“네가 3학년 때 선생님을 좋아했어? 너 남자 선생님이라고 안 좋아했었잖아.”
“그랬지. 그랬는데 1년 지내보니까 좋았어. 내가 처음에 딱 좋은 사람이라고 알아봤어.”
“어떻게?”
“그 선생님은 내 이름을 한 번에 제대로 불러줬거든.”
아이는 3학년 때 선생님이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줬던 순간을 다시 생각하는 듯 빙긋 웃더니 “아마도 선생님이 학교에 오시기 전에 내 이름을 연습해 보신 것 같아.”하고 덧붙여 말했다. 아이는 독일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물어보면 이름의 두 음절 가운데 J가 들어간 음절의 ‘ㅈ’ 발음을 강조해서 말하곤 했다.
‘G’로도 ‘Z’로도 ‘ㅈ’ 발음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는 것은 겪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말하게 하는 것이 생각보다 피곤하다는 것도 해 본 사람만 아는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여러 번 가르쳐 주는 것은 생각보다 번거롭고 귀찮아서 몇 번 하다가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아이는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때마다 자기가 원하는 발음을 상대방이 구사할 때까지 서너 번의 시도를 하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엄마는 독일 사람들이 엄마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해주지 않아도 괜찮거든. 여기는 한국이 아니니까 여기 사는 사람들은 한국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기 어려울 거 같아. 근데 너는 그게 싫어?”
“응. 그건 내 이름이 아니니까.”
아이의 단호한 대답에 조금 놀랐다. 다른 이들이 불러주는, 자신이 생각했던 발음과 다른 그 이름들은 자기 이름이 아니기에 아이는 그토록 열심히 설명했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이곳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리라는 기대를 애초에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내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해 애써주는 사람들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제멋대로 부르는 사람들에게 딱히 서운한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나 또한 여러 나라에서 온 그들의 이름을 의도치 않게 잘못부를 때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독일인들의 이름은 영어식 이름과 철자가 같아도 발음이 다르다. Rebekka가 레베카가 아니라 ‘헤베카’에 가깝고 Catherine가 캐서린이 아니라 ‘카타리네’와 가깝게 발음된다. 그러니 단순하게 생각하면 ‘낯선 발음’ 문제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아이는 자기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길 바라는 걸까?
“당신 이름에는 J가 없으니까 아예 다르게 불릴 일은 없겠다, 그렇지?”
아이의 J발음을 생각하다가 이름에 J가 없어 우스꽝스럽게 불릴 일이 없는 남편의 이름이 부러워졌다. 그런데 남편의 답변의 예상 밖이었다.
“J는 없는데 K가 있어서 ‘ㄱ’이 ‘ㅋ’이 되긴 하지.”
“아, 그렇겠구나. 우리 딸은 오늘도 선생님께 이름을 제대로 가르쳐 주고 온 모양이야.”
“한국에서는 선생님 이름을 부를 일이 없는데 여기에서는 서로 이름을 불러서 그런가?”
아, 그럴 수 있겠구나. 갑자기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이에게는 이름이 곧 자기였던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선생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다.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배웠고 부모님의 이름을 말할 때도 한 자 한 자 짚어서 불러야 한다고 배웠다. 내가 살아온 문화는 이름보다 호칭이 먼저이기 때문인지 학교에서는 선생님들께 번호로 불리기 일쑤였고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나이를 물어본 후 서열을 정하고 호칭을 정해야 서로 간의 관계가 말끔해지듯 했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들 때문일까? 나는 여전히 내 이름만 불리면 낯선 기분이 들어 누가 내이름을 제대로 부르던 말던 별 상관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것 자체로 너무 낯서니까. 그러나 지금 내가 살고 있고 아이가 커가는 이 사회는 서로 ‘이름’을 부른다.
아이는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이름을 부르고 또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불릴까? 아이 주변의 수많은 이름들 중에 낯설게 튀는 내 아이의 이름은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느껴질까? 신기하고 특별할까? 아니면 발음하기 귀찮은 이름일까? 다행히 이제껏 아이의 주변 사람들은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여러 번 가르쳐 줄 때 귀찮아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했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관계를 맺는 첫 단추인 것처럼 아이의 입모양과 발음을 따라 하며 천천히 배웠다. 아이가 그 발음이 맞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면, 그제야 어렵다며 웃어 보였다.
박완서 작가는 이름은 자신을 존재케 한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과 꿈이 담긴 선물이고, 자신이 남과 다른 고유한 존재라는 걸 인식하게 한 최초의 울림이고, 자신이 지닌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고, 무엇보다 부르라고 지어준 것이라고 했다.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매우 설렜다. 부르기도 쉽고 좋은 의미를 가진 이름을 찾으려고 애썼다. 우리는 아이가 오롯이 자신의 인생을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뜻을 담은 한자를 모아 이름을 지었다. 나의 부모도 내 이름을 지을 때 그러셨을 것이다. 이름대로 사람의 삶이 되는 거라고 좋은 이름을 지어 많이 불러줘야 한다고 했다. 오죽하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을까! 아이의 말이 옳았다. 그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니라던 그 말이 맞았다.
아이의 독일 유치원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 기억난다. 잠시 인사만 하는 자리였다. 유치원 선생님은 우리에게 악수를 청하며 자기 이름을 소개한 뒤, 간단하게 줄인 이름을 가르쳐주며 그 이름을 부르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의 이름을 물었고 그녀에게는 낯설었을 그 이름을 천천히 따라 했다. 아이와 악수를 하며 눈을 맞추고 ‘예쁜 이름이네.’ 하며 웃었다. 아이도 그녀를 따라 작게 웃었다. 그렇게 둘의 관계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