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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엽 Dec 26. 2015

she was. I am, #2, #3

둘의 이야기, 일방의 기록

# 2.

     자 여기. 그녀는 검은 커버의 노트 한권을 내게 건넸다. 졸업 논문이었다. 기다려보라고 말하곤 건너편에서 내가 책을 읽는 동안 하드커버 속 첫 장에 무언가 쓰고는 준 것이다. 논문이라는 특성 상 내게 써준 첫 장의 그 짧은 글과 어울릴 로맨틱한 제목을 기대할 순 없었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보물 1호 탄생의 순간이었다. 내 이름, 이야기 하나 있을 리 없었지만 그녀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읽고 또 읽어댔다.


   그렇게 읽고 또 읽어 논문이 연애편지처럼 술술 읽혀질 때쯤, 달리 설명하자면 그녀의 미국 유학 첫 학기가 그 다음 기억으로 떠올랐다.

 

#3.

   나는 내가, 그리고 그녀가 ‘그리하여 그 둘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답니다' 라는 약속된 엔딩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래오래라 부를 수 있는 긴 시간 동안 행복함의 정서를 향유하며, 모든 것에 우선해서 우리 둘은 함께일 것이라 믿었다. 나와 그녀가 동화에 등장하는 왕자나 공주, 혹은 거지였던 왕자나 하녀였던 공주가 아닌 것은 물론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거기에 근접한 뭔가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생각과 믿음과 예상들이 모두 보기 좋게 엇나가고 있었다. 아직까지 나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어떤 모양새로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이 안됐다. 어찌됐든 ‘나'는 이런 상황에 온 것 자체가 의문이었기 때문에, 그저 동그랗게 치켜뜬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을 뿐이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도통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이대로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내가 생각했던 약속된 엔딩은 더 이상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부서져버리고 만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고 믿는 나는 지금의 상황을 타파하고 내 생각과 믿음과 예상을 다시 온전한 방향으로 흘려보내기 위해 궁리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부터 파악해야 뭐라도 어떻게 해볼 수 있기 때문에,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되짚어보는 일이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일에 동원될 줄은 몰랐던, 미처 준비되지 못한 나의 머리는 자신감 없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천천히 뱉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가장 근래의 일부터 훑어 내려가며 기억을 더듬어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녀를 살폈다. 그녀와 나의 여러 순간에 대한 조심스런 접근들이, 각기 다른 그 때들 위로 덧씌워졌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감아 봐도, 이렇다 할 수확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머리는 목적을 잊고 순간순간의 그녀를 지나쳐가며 감탄과 기쁨에 휩싸일 뿐이었다. 그녀를 좋아한다는 방향으로 치우칠 대로 치우친 머리가, 그녀를 향해 무조건적인 투항상태에 돌입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상황은 최악이고 상황대처도 최악이었지만, 자꾸 나의 입가엔 웃음이 머금어졌다. 이상하게도 정말 최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급하지 않았다. 이 모두가 기억에 남아있는 그녀의 모습들 때문이었다. 기억 속에서 다른 누군가에 비할 바 없는 그녀, 내게 정말 특별한 그녀와 함께이던 내가 비춰졌고, 그 안쪽에서 난 그녀가 뿜어내는 보호막에 힘입어 온전한 인간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친구라는 작위를 수여받기 위해 그녀가 겨누는 칼끝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나, 사귀기 직전의 불확실성을 즐길 여유가 없었던 나, 처음 그녀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바동거렸던 나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나들이 각기 의미를 가지고 그녀 앞에 미소 지었다. 나는 그 미소에 마주쳐, 내 안의 여러 나들이 하나로 된 것은 모두 그녀 덕분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 실감은 나를 한 바퀴 휘감고 돌더니,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는 위기감으로 금세 변모했다. 아직까지 왜 우리가 이렇게 변했는지도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예전의 모습으로 지낼 수 있다면 그 어떤 일이든지 해야겠다는 결의가 생겨났다. 최악의 상황에서, 뭐가 어떻게 되든 내게 그녀가 필요하다는 간단한 사실 하나만 건진 나는, 비장해진 채 머릿속에서 가장 최근의 그녀를 다시 불러냈다.


※ 비장하다 : 슬프면서도 그 감정을 억눌러 씩씩하고 장하다.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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