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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omee Dec 11. 2017

베를린에서 가장 작은 영화관

<LICHTBLICK KINO>에서 만난 한국 독립 영화 <이태원>

가끔은 남들이 다 아는 그런 곳 말고 나만의 공간을 찾고 싶은 때가 있다. 여행자도 마찬가지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여행과 주거 어느 사이에 놓여 있는 상태긴 하지만 어느 잡지 어느 웹사이트에서 검색만 하면 후룩 나오는 그런 곳 말고 우연히 보석 같은 곳을 발견하고 싶다. 그런 날이면 그냥 무작정 마음에 끌리는 지역 하나를 골라 걷는다. 


어느 일요일은 마우어 파크에서 시작해 그 건너편의 골목 사이사이를 걸었다. Kastanuenall이라는 거리에 이르러 아주 오래된 건물의 낡은 상점과 그라피티 그리고 창가에 덕지덕지 붙은 포스터들이 발길을 붙잡았다. 간판을 올려다보니 <LICHTBLICK KINO>라고 적혀있다. KINO(키노)는 독일어로 영화관이다. 영화관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규모가 작은데 포스터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 영화관이 맞았다. '나중에 검색해봐야지'라는 결론에 이르러 발길을 돌려 걷기를 몇 걸음, 궁금증에 못 이겨 결국 그곳으로 들어섰다. 어쩌다 닿은 이 곳에서 한국 독립영화를 보게 될 줄은 이때만 해도 상상도 못 하였다.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열댓 명만 들어와도 꽉 차 보일 만큼 협소한 공간이 나왔다. 왼편에는 작은 바(Bar)가, 우편에는 앉아 대기할 수 있는 낮은 소파가 있었고 소파 사이에는 유물 같은 필름 영사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고전 명작 포스터들이 필름 페스티벌 홍보 포스터와 함께 벽 여기저기에 장식되어 있다. 


영화관 안쪽에서 직원이 문을 열고 나오더니 말을 걸었다. 그냥 구경하러 왔다 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안쪽으로 사라진다. 입구임을 나타내는 표지판을 보니 문 뒤에는 상영관 하나가 있는 듯했다. 1994년 오픈한 <LICHTBLICK KINO>는 작지만 큰 영화관이라는 평을 듣는 곳이다. 베를린 소규모 독립영화관 중에서도 50제곱미터 밖에 안 되는 가장 작은 영화관으로 위치해 있는 건물은 프렌츨라우어베르크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가운데에 키가 낮은 건물이 영화관이 위치한 건물이다.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로비의 작은 바(Bar)와 대기 공간을 지나 제일 안쪽에 위치한 상영관은 32개의 계단식 좌석이 9줄로 나있다. 원래 이 영화관은 과거에 정육점이 있던 자리였는데 그 흔적을 로비 곳곳에서 여전히 발견할 수 있다. 군데군데 노출된 벽의 타일이나 고기의 살덩이가 걸려있던 금속 걸이 등의 모습은 아늑한 분위기가 맞물려 묘한 분위기를 만든다.




작지만 '큰' 영화관 <LICHTBLICK KINO>


LICHTBLICK KINO 공식 웹사이트 :http://www.lichtblick-kino.org


작지만 '큰' 영화관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 영화관이 규모는 작아도 큰 목소리를 내는 독립영화관이기 때문이다. <LICHTBLICK KINO>는 베를린 문화 전반에서 정치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주제의 작품들을 다양하게 다루기 위해 노력한다. 예술영화, 다큐멘터리, 단편영화, 고전 명작,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 영화 등 다양한 범위의 영화를 상영하고 역사적 작품을 기념하기 위한 회고전을 기획하기도 한다. 


누벨바그 영화 운동을 대표하는 두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의 회고전이 열리기도 하였고 매년 2월 22일에는 초현실주의 영화 거장 루이스 부뉴엘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상영회가 열린다. 지금은 한창 <Sound Watch>라는 뮤직 필름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다. 



베를린의 작은 영화관에서 한국 독립영화를 만나다 <이태원>


집에 가져온 영화관의 프로그램 팸플릿에서 <이태원>이라고 또렷이 적힌 한글 세 글자를 발견하고선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Asia Film Berlin: <이태원>'이라고 적혀 있었으며 영화에 대한 줄거리가 영어로 소개되어 있었다.  여기 베를린에서도 가장 조그맣다는 영화관에서 한국 독립영화를 볼 수 있다니 고민도 없이 티켓을 구매하고 그 주말 다시 영화관을 찾았다. 


<이태원>은 2016년 개봉한 강유가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이태원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이 곳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3명의 여성들의 삶을 가깝게 관찰하면서 젠트리피케이션과 성매매라는 사회적 문제를 복합적으로 다룬 영화다.


토요일 저녁 8시 30분. 상영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로비로 들어왔다. 한국인을 비롯해 동양인 서양인 할 것 없이 여럿 보였다. 상영관은 내부는 매우 아담했지만 그래서 더욱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한국의 멀티플렉스처럼 스크린이 거대하다거나 사방팔방에서 지원되는 입체적 사운드 시스템은 없지만 영화에 폭 빠져들기에는 충분했다. 


<이태원>이라는 다큐멘터리는 반가움과 동시에 낯섦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서울에 살 때 그렇게 자주 가곤 했던 이태원의 모습이 다큐멘터리 속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이국적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서울의 모습을 봐서 그런 것일 수도. 혹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태원이 아닌 밝고 화려한 면 반대쪽에 어둡게 가리어진 이태원을 마주하여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끝나고 여운을 나누다


영화가 끝난 뒤에는 로비에 다 함께 모여 한국 핑거 푸드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마련됐다. 주최자님께서 직접 준비하셨다는 이날의 핑거 푸드는 잡채였다. 지난 추석에도 먹지 못한 잡채가 어찌나 맛있던지 친구는 '맛있다'를 연발하며 두 접시나 해치웠다. 


이 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음식을 나누며 편한 분위기 속에서 영화를 매개로 각자의 생각과 이야기들을 나눴다. 음식과 함께하는 대화는 따뜻하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는 정답이 없듯이 마음에서 나오는 말들로 대화를 열어가다 보면 오늘 처음 본 사람과도 조금은 어색한 기류 안에서도 대화가 말랑해지고는 한다.



영화 <이태원>의 상영을 직접 기획하신 'Asia Film Berlin'의 운영자 분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Asia Film Berlin'는 이름의 프로그램을 통해 베를린의 독립 영화관에서 주기적으로 아시아 영화를 소개한다고 하신다고 한다. 처음에는 독일에서 한국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에 좋아하는 영화를 틀기 시작한 것이 규모가 커졌다고. 


그 덕분에 한국어로 된 영화를 베를린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렇게 정감 있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졌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영화관을 나와야 했다. 문을 닫고 나오며 친구와 나는 '정말 좋았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서로 무엇이 특히 좋았는지에 대해 연신 이야기하며 집으로 향했다.



소규모 독립 영화관. 무엇이 특별하게 만드는 걸까?

'정말 좋았다'라는 말에는 단순히 '좋은 영화'를 본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보통 '영화 어땠어?'라고 묻거나 '재밌었어' 혹은 '그냥 그랬어'라고 답하면서 영화를 관람한 것 그 자체에 초점을 맞췄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을 단초로 내가 '좋은 경험'이었다고 느꼈던 구체적인 이유와 베를린의 작은 영화관에 대한 궁금증이 연달아 생겼다.   


베를린에는 다양한 소규모 영화관이 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베를린에는 영화관이 많다. 독일은 세계 영화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고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지나오면서 독일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1900년대 초반에는 점포 영화관(Ladenkino, 초기 영화관의 형태로 아직 영화 상영을 목적으로 건축된 공간이 아니라 빈 점포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던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형태의 소규모 영화관이 많았다. 그러나 해가 지날수록 영화관이 성행하자 독일에도 고급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규모 영화관이 생겨났고 동네의 조그만 영화관들은 그 여파로 다수가 문을 닫게 됐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수많은 독립 영화관들이 베를린에서 생존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동네의 작은 영화관을 찾는다. 공룡 같은 거대한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대결해 '생존'했다고 하는 표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사실 대형 영화관과 소규모 독립 영화관들은 길을 걷는 노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작은 영화관들은 대부분 도심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대형 영화관과는 달리 집 근처에서 편안한 장소를 제공하며 규모의 격차를 매웠다. 멀티플렉스에서 상영하지 않는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를 다룬다.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이다. 



아늑하고 편안한 동네 영화관을 넘어서 다큐멘터리 영화, 아방가르드 혹은 초현실주의 영화, 서브 컬처 영화, 아주 오래된 예술 영화와 고전 명작 등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제공한다. 블록버스터를 보고 싶은 사람들은 대형 영화관으로, 다양한 영화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은 소규모 영화관을 찾는다. 독일 영화관의 특이한 점 하나는 해외 영화들이 모두 독일어로 '더빙'되어 나온다는 점인데 이 것도 작은 영화관을 찾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토르와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를 독일 성우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해보자. 이 같은 처사는 독일인의 높은 문맹률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더빙보다는 원어에 자막을 선호하는 한국인으로서 매우 어색하게 느껴진다. 작은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해외 영화는 대부분 원어로 상영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원어 그대로의 영화를 즐길 수 있다.  




독립영화관은 또 하나의 문화공간이자 플랫폼이다


독립 영화관들이 기획하고 운영하는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 또한 경쟁력이 된다. 음악 필름 페스티벌이나 원자력과 방사능에 관한 세계 최초의 영화제처럼 다양한 주제의 필름 페스티벌이 열린다. 회고전을 통해 특정 감독이나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주파수가 맞는 사람들이 모여 맘껏 떠들고 토론하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기도 한다. 이 날 <LICHTBLICK KINO>에서 경험한 것과 같이 영화 관람 후에 핑거 푸드를 즐기며 영화에 관한 생각을 나누고 친목을 다졌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것들이 결국 대형 영화관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과 가치를 만들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현실적으로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지역마다 곳곳에 자리 잡고 있으니 접근성이 좋아 자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작 볼 것이 없어 되돌아 나오거나 가끔 다수의 상영관에 반복적으로 상영되는 소수 영화들에 혀를 찼던 기억이 많다. 그런 때에는 종종 독립영화관을 찾아 부족함을 채우곤 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이번 주말 독립영화관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한국에서는 베를린만큼 다양한 독립 영화관을 찾기는 힘들지만 막상 찾아보면 생각했던 것 외로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것이다. 조금 접근성이 떨어지거나 좌석이 비좁을 수도, 상영 환경이 열악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의 특별한 경험을 기대해 볼만 하다. 세상은 넓고 볼 영화는 많고 주말은 매주 찾아온다. 다양하게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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