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었던 걸까?
2016년 11월
나는 영국의 어느 공항에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두 달여간의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귀국행 비행기는 프랑스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에서 타야 했지만 공항에서 바로 대기 후 환승을 해야 했기에 엄밀히 따지자면 영국이 내 여행의 마지막 국가나 마찬가지였다. 장기간의 여행의 피로가 누적되어서였을까, 영국 한인민박의 숙소가 너무 추워서였을까, 컨디션이 꽤나 좋지 않았다. 몸에서 열도 나고 목부터 왼쪽 턱 부근까지 퉁퉁 부어서 그 상태가 꽤나 심각해 보였다.
프랑스로 이동하는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나는 영국의 어느 공항에서 간단히 귀국 선물을 사기로 했다. 몸 상태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선물을 살만큼 좋지 못했기도 했고, 장기간 여행을 하다 보니 내가 처음에 계획을 세운 것보다 지출이 많아지기도 해서 그냥 공항 안에서 적당한 선물을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공항을 조금 둘러보다 보니 화려한 꽃무늬 장식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소품과 액세서리를 파는 곳을 발견했다.
평소라면 꽃무늬를 촌스럽다고 생각했겠지만 장소가 영국이어서였을까 뭔가 현지에서만 살 수 있는 있어(?) 보이는 물건들처럼 보였다. (물론 한국에서도 아주 쉽게 구할 수 있는 브랜드였다.)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아, 나는 마치 세트 선물처럼 보이게 여러 가지 물건들을 함께 구매했다. 그 물건 중 하나는 다이어리였다. 한 달하고 며칠 뒤면 한 해가 바뀌는 연말이기도 했으니 다이어리는 그 시기에 적당한 선물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다지 비싸고 좋은 선물은 아니라 조금은 미안한 마음에 다이어리의 첫 장에 짧은 글을 몇 자 적었다.
2020년 3월
그로부터 3년이 조금 넘게 흘렀다. 벌써 3년 같기도 하고 고작 3년 같기도 하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에게 있어서 지난 3년은 참으로 다양한 일이 있었고 많은 부분이 변했으며 적지 않은 부분이 여전히 그대로였다. 수많은 계획을 세웠지만 대부분 당연하게도 계획대로 되지 않았으며 신중하게 고민하고 결정한 선택들은 언제나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안 좋은(?) 결과들을 보여주곤 했다. 그렇게 다시 나는 현실에 치여 전쟁같이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것이 벌써 3년 같기도 하지만 고작 겨우 3년 같기도 한 게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날에 갑자기 카톡으로 사진을 한 장 받았다. 사진 속에는 3년 전 영국 공항에서 구매한 꽃무늬 다이어리에 맨 앞장에 써놓았던 짧은 편지가 있었고 나는 오랜만에 그때 내가 쓴 글을 읽었다.
그때 나는 참 감성적이었고 이상적이었다. 살면서 가장 힘든 시기를 거쳐 나름의 큰 결심을 했고 이상적인 꿈을 품고 여행을 떠났다. 지금 생각해도 보다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쳐있었고 그런 나는 조금은 나약했다. 그랬기에 이상적인 것을 동경했다. 편지 속 내용은 여지없이 그런 그때의 나의 심리 상태가 적나라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하게 된 하나의 문장이 있다.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 보려 해”
그때의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었을까. 내가 바랐던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워낙 그때까지 불행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시기였기에 행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당연했던 것 같다.
아니 사실 굳이 불행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니까,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바람 중의 하나였겠지. 하지만 퇴근길에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던 ‘의미 있는 삶’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의미부여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기란 꽤나 피곤한 일이다. 특히나 인생이 어디 한 번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간 적이 있었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인생은 그저 오늘 보낸 하루의 누적일 뿐이다. 그래서 의미를 부여하거나 찾는 순간, 많은 것들이 괴로워진다.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무서운 단어를 삶이라는 것에 붙여 썼을까. ‘의미 있는 삶’이란 쉽게 뱉을 수는 있지만 시간이 지나 주워 담기에는 너무 버거운 말이라는 걸 저때는 알지 못했던 것 걸까 혹은 알면서도 이상적으로 그런 삶을 꿈꿨던 걸까.
3년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나는 그토록 바랐던 그 삶을 살고 있는지, 퇴근길 버스 안에서 계속 생각해 봤다. 고민에 대한 답은 비교적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지만 선뜻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정하려고 해도 나는 안다. 나는 지금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예전만큼 힘들고 여유롭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 물론 그때와 ‘힘듦’의 결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굳이 행복해지려고 애쓰지 않는다. 예전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의 나는 행복이 삶의 우선순위는 아니다. 그리고 삶에서 굳이 의미를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소확행’이라는 말이 한때 유행했듯이 너무 거창하고 추상적으로 삶을 정의하고 싶지 않다. 그런 것들은 그저 그 순간에 ‘작지만 확실하게 알면’ 그만인 것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3년 전 호기롭게 뱉어냈던 그 말을 지키지 못한 것 같아 한편으로는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원하는 삶을 표현하는 방식이 지금은 조금 바뀌었지만 그래도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나는 충분히 노력했나, 나는 내가 뱉고 남겨 놓은 말의 흔적에서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름 노력했다고 말하고 싶긴 하지만 ‘노력’이라는 표현보다는 ‘애쓴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적절하지 않나 싶다. 노력했다는 말을 쓰기에는 나는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기가 매번 힘들고, 때로는 게으르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애쓰는 중이다.
이렇게 애쓰다 보면 언젠가 노력했다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날도 오겠지
그때가 오기 전까지 애쓰다 지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