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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Jul 23. 2023

아메리칸드림은 달콤하지 않았다

어쩌다 정신병원 (18)


요즘 빠져있는 “60 Days In”이라는 미국 교도소 리얼리티 시리즈가 있다.


각종 배경의 민간인들을 교도소에 60일 동안 재소자로 잠입시켜 해당 교도소의 문제점과 위험한 수감자들을 파악하는 프로그램이다.


시즌 1에 나오는 경찰관 테미 (Tami)는 처음부터 적응을 하지 못했다.


Tami

경찰관이라서 재소자들의 심리를 잘 파악할 것 같았지만, 테미는 환심을 사기는커녕 그들을 자극해 대치상황까지 만들어서 제작진과 교도관의 진땀을 뺐다.




테미는 처음부터 기선제압을 한다고 인상을 팍 쓰며 교도소에 입소했다.


최대한 쫄지않는(?) 인상을 줘야지 사람들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테미는 수감 중에도 사람들과 항상 거리를 두었다.


친근하게 다가오는 재소자들에게 일부러 미간을 찌푸리며 모두를 의심하는 테미의 경계심은 그녀가 경찰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나중에, 테미가 가정형편 때문에 여러 위탁가정을 거치며 자랐다는 이야기를 공유했을 때, 테미의 몸짓과 표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긴장감이 왜 내게 익숙했는지 깨달았다.




미국에서 혈혈단신 철새로 살았던 나는 그녀의 많은 모습이 이해가 됐다.


유년기를 미국에서 가족과 보내고, 중3 때 홀로 미국에 남았다.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고등학교 세 곳과 홈스테이 가정 다섯 곳을 거쳤다. 연고도 없는 각각 다른 주 (state) 세 곳으로 전학을 다녔다.


한국인과 미국인 가정에 살았고 그중에서는 부모님 지인도 있었고 미국에 와서 처음 만난 분들도 계셨다.


이렇게 예민한 청소년기에 자주 이사를 한 이유는…


누군가의 빌어먹을 아메리칸드림 때문이다.  




처음 홈스테이를 한 곳은 미국 시골에 있는 한인 목사 집이었다.


목사님은 성경보다 한국 드라마를 더 자주 보는 분이었다. 신도수가 적은 한인교회인 만큼 사모님이 부업까지 하면서 돈을 버셨지만 그는 항상 테레비를 보거나 골프 포즈를 연구했다.


무교였지만 사모님과 목사님은 일주일에 2-3번 교회를 오라고 강요했다. 억지로 찬양팀에 들어갔다.


교회를 가는 날의 장점도 있었는데 신도들을 위해 만든 음식이 주방에 푸짐하게 쌓였다. 사모님은 교회 신도들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시느라 나의 끼니를 매번 신경을 쓸 겨를이 없으셨다. 배고플 때는 서운하다가도 뼈 빠지게 일하는 사모님의 모습을 보면 차마 배고프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그녀가 생각했던 꿈의 땅이었을까.




목사님은 가끔씩 내게 이상한 말을 하셨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희롱이다.


“여자는 허벅지가 두꺼워야 하는데 너는 합격이니, 허리힘이 중요하다니” 등등. 나는 만 15살이었다. 서른을 앞둔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말들이다.


왜 성경과 다른 행동을 하냐고 따져 물었더니, 나는 “성경을 전하는 사람일 뿐 그대로 행동할 필요는 없다 “라는 상식 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 기독교에 대한 비방이나 비난을 할 의도는 전혀 없다. 특정 목사의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혹시 불편해하실 분이 계실까 봐 덧붙인다).


목사님은 매일 3시에 학교에서 나를 픽업해야 했다. 운전해도 집까지 20분 이상 걸렸고 도보가 없어서 걸어서 집에 가기는 불가능했다.


그 당시 다니던 학교 통학 길. 구글해보니 여기는 아직도 도보가 없다.


목사는 하루도 안 빠지고 매번 늦었다.


매일 학교 밖 벤치에서 1-2시간 동안 목사를 기다렸다 (학교가 끝나면 안에서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매번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늦었다며 씩 웃었다. 눈치를 보면서 조금 일찍 와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씨도 안 먹혔다.


일 년간 매일 밖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어쩔 때는 너무나 추웠고, 어쩔 때는 너무나 더웠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부모님께 말한 뒤, 다른 주에 살고 있는 부모님 지인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기로 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커녕 지옥이 날 기다리고 있을줄.




지금 생각해 보면, 첫날부터 쌔했다.


십몇년만에 다시 만난 최 씨 아저씨는 초등학교 때 뵀던 따뜻하고 정겨운 아저씨가 아니었다.


그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인사도 없이 나와 내 동생 (그때 동생도 잠시 유학을 했다)을 공항에서 픽업했다.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침묵 후 자그마한 동네에 차가 들어섰다.


최 씨 아저씨와 나의 엄마는 미국 모 대학원 동기였다.


2000년대 중반, 정부 장학금으로 이 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은 공무원 부모님과 달리 최 씨 아저씨는 한국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이민을 오셨고, 비자와 취업 때문에 대학원을 다니시는 입장이었다.

두 가족 다 넉넉지 않은 상황이어서 미국 저소득층이 사는 아파트에 살았고 가족단위 유학생이라는 공통점 덕분에 쉽게 친해졌다.




십몇 년 후, 최 씨 아저씨 가족은 드디어 미국 ‘중산층’ 동네에 입성한 것 같았다.


한때 우리가 부러워했던, 푸른 정원이 있고 세모난 지붕이 달린 하우스에 차를 주차하셨다.


햇빛이 잘 통하지 않는 집이었지만 garage (차고)와 아파트보다 널찍한 공간을 보며 나와 동생은 최 씨 가족이 이민에 성공한 것 같다면서 우리 일 같이 기뻐했다.


하지만 나와 동생은 곧 깨달았다.


성공은커녕, 최 씨 가족의 아메리칸드림은 박살 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파편은 나와 동생에게 향하고 있었다.




최 씨 가족이 돈 때문에 나와 동생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기에 얼마 걸리지 않았다.


부모님이 최씨 부부에게 몇 백씩 매달 송금했지만, 최 씨 아주머니는 매일 나와 동생을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투덜거렸다.


어디든지 운전을 해야 하는 미국 시골 특성상, Ride가 필요할 때가 많았지만 단 한 번도 태워다 준 적이 없었다. 심지어 용기를 내어 방과 후 처음 놀러 간 친구집에서 집으로 돌아올 방법이 없어서 머리가 새하얘진 적도 있었다.


미국 고등학교는 방과 후 활동이 거의 필수다.


친구를 사귈 때뿐만 아니라 대학 입학원서에도 학교에서 한 활동을 써야 한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수록 플러스 요인이다.


치어리더는 못 했지만 치어리더 친구 덕분에 코스프레는 했다


하지만 등교와 하교를 제외하고 절대 픽업이 불가능하다고 못 박은 최 씨 아주머니의 단호한 태도에 나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었다. 가끔 친구한테 픽업을 부탁하다가 부담스러운 마음에 나중에는 학교활동을 포기하고 자발적 아싸를 선택했다.


매일 막막했던 미국 고딩시절


나와 동생은 아직도 폭식을 하는 습관이 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뭐 하니!”하고 날카롭게 물어보는 최 씨 아주머니 때문에 주방 근처도 못 갔다.


하루는 집에 오니 불고기 냄새와 연기가 자욱했다.


오랜만에 맡는 불고기 냄새에 신나서 주방에 들어갔더니 최 씨 아주머니가 프라이팬에서 벅벅 탄 불고기 잔해를 긁어내고 계셨다.


일부러 내가 오기 전에 부부와 외동아들이 몰래 불고기 파티를 했던 것이다.


본인도 민망했는지 웃으며 라면을 곧 끓여주겠다고 말했다.


최 씨 가족은 거의 항상 따로 식사했다.

동생과 나의 저녁은 항상 라면이나 버터간장밥이었다


우리는 사이좋게 반년동안 각각 -7킬로가 빠졌다.

동생은 아직까지 라면을 먹지 않는다.


배고픔보다 힘든 것은 추위였다.


휑한 미국 남부의 겨울바람은 꽤나 매서웠다.


남동생은 최씨네 외동아들과 ‘운 좋게’ 방을 같이 써서 히터를 사용했지만, 내 방은 항상 냉기가 가득했다.


침대가 창가 밑이어서 너무 추웠다. 플라스틱 물통 두병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워서 바람이 덜 닿는 바닥에서 잤다. 다행히 미국 집은 바닥이 카펫이라서 허리가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어린 마음에 타지에서의 고생은 당연한 것이고 무조건 참아야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가끔씩 선을 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중에 하이라이트는 ‘변기’ 사건이었다.


어느 날, 화장실 변기 안에 큰 벽돌이 있었다.


최 씨 아주머니는 돈을 아끼기 위해 온 가족이 (합쳐서) 하루에 한 번씩 화장실 물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대변, 소변 상관없이….


집은 곧 썩은 된장 냄새로 가득 찼다 (순화해서 표현한 것이다).


매일 학교 가기 전 냄새가 날까 봐 열심히 페브리즈를 뿌렸다.


그때 당시 학교 카운슬러에게 거의 매일 하소연하듯 최씨네에서 겪는 이런저런 썰을 풀었다. 유일하게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주시는 분이었다. 여러 이유로 당시에는 차마 부모님께 말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변기 에피소드를 듣자 학교 카운슬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나를 데리고 최씨네로 향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카운슬러는 얼굴을 찡그렸다.


하긴, 한국인도 견디기 힘든 똥된장 냄새인데 미국 시골 할머니한테는 얼마나 역겨운 냄새였을까….


바로 짐을 싸서 집을 나오라고 했다.


며칠 후 카운슬러와 최씨네로 돌아가서 동생 짐도 싸서 나왔다. 동생은 그날부터 친구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두 번 이사를 하며 최 씨 가족의 따가운 눈초리를 견디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었다.


그 후, 미국 가족과 살면서 세끼 설거지 담당을 하면서 눈칫밥을 먹다가, 졸업하고 바로 탈-미국을 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반추를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정신병동에서 남는 것은 시간 밖에 없었다.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언제부터 삶이 삐걱거렸는지 알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일에 대한 스트레스나 미래에 대한 불안 등 표면적인 이유만으로는 나의 깊은 우울과 절망이 설명되지 않았다.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국 학창 시절 때 겪었던 기억은 익숙해진 악몽처럼 가끔 수면 위로 올라온다.


그때 생긴 타인에 대한 경계심과 불신은 지금까지도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테미’에게 보이던 조바심과 항상 주위 눈치를 보던 불안한 눈빛은 내게도 존재한다. 어린 나이에 지속적으로 적대적인 환경과 사람에게 노출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십몇 년 동안, 미국에서 만난 어른들을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복수를 꿈꾸기도 했고, 용서를 하자고 나를 다독여보기도 했고, 잊자고 다짐도 수천번 했다.


괴로웠지만 반추를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어야지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 이해는 ‘accept (받아들임)‘이 아닌 ‘understand/analyze (앎, 분석)’이다.


특히 최 씨 가족이 왜 바뀌었는지, 어쩌다가 그렇게 내몰렸는지 등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혹시 내가 잘못을 했었는지, 실수한 점은 없는지 셀프 검열을 수억 번 반복했고 화살을 내게 돌리기도 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유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모든 것이 내 잘못 같은 말도 안 되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머리가 커보니 좀 더 선명해졌다. 그들이 ‘이해’가 됐다


그들은, 쉽게 말하자면, 맛탱이가 간 것이다.


더 고상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믿었던 스윗 아메리칸드림은 그들을 배신했고, 기약 없이 십 년 넘게 영주권을 기다리며 현실에 치이고 치이다 보니 그렇게 구질구질하고 분노와 짜증으로 가득한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혹한 이민자의 삶이 그들을 fuck over 했고, 결국 맛탱이가 가서 나와 동생을 화풀이 대상으로 대했던 것이다. 그것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나중에 들어보니 최 씨 가족은 영주권을 못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미국 청소년기 때 겪었던 일 전체를 글로 풀어내기까지 11-12년이 걸린 것 같다. 몇십 번 쓰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우울증은 양파 같다.


양파 껍질 하나하나에 사연과 고통이 담겨 있다. 까면 깔수록 눈을 맵게 하는 트라마가 나온다.


그래서 우울증을 치료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병원에서 의사에게 단발성으로 공유하는 힘든 일이나 증상 몇 개로 한 사람이 견뎌냈던 삶의 무게와 고통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정신과 의사가 한 사람씩 인생사를 들으며 치료할 수는 없다.


이삼백만 원이면 대학병원에서 몸 전체에 대한 건강검진을 할 수 있고 각종 차트로 문제점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뇌는 그럴 수가 없다. 비싼 장비로 검사를 해도 ‘하드웨어’인 뇌 외부의 손상은 파악할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긴 트라마는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 고등학교 때 겪은 일들을 말과 글로 배설하고 또 배설했다. 억울하다고 가슴을 치며 울었다. 오랫동안 묻어둔 기억이 계속 올라왔다.


‘내게 일어난 불행한 일’이란 제목의 리스트를 만들어서 교수님께 건넸다.


전부 읽어볼 시간이 없다던 교수님은 며칠 후 내게 “박주원 씨는 운이 참 없었네요…“라고 하시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다 읽어보신 것 같다.


맞다. 나는 참 운이 없었다. 그랬을 뿐이다.

더 이상 내 탓을 하지 않기로 했다.


교수님이 그러셨다.


이제 나는 나를 지킬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고. 더 이상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일부러 인상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퇴원 기념으로 미간 보톡스를 맞았다. 인상쓰기가 습관이 되어 의학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효과가 꽤 좋은 것 같다.


to be continued.


2012년 여름 졸업여행 때. 한국이 그리웠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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