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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Jul 30. 2023

어쩌다 미투의 시발점

어쩌다 정신병원 (19)

첫 직장에서, 어쩌다, 미투 #Metoo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것도 해외에서, 외노자 신분으로….


미투 사건과 후폭풍으로 인해 거의 20대 전체를 날렸다. 커리어와 멘탈이 나란히 무너져 내렸다.


내 인생은 이 사건 전과 후로 나뉜다.


정신병원에서조차 꺼내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뒤늦게, 여기에 풀어보려고 한다.




2016년, 대학교 졸업 후 바로 싱가포르 국영방송국에 시사교양 피디로 입사했다.


일했던 방송국은 조연출과 연출을 따로 뽑는다. 세 번의 외신 인턴 기자 & 피디경력을 인정받아 조연출을 거치지 않고 경력직 피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입사 당시 만 22살이었다. 막내 중 막내였다.


병아리 피디 시절


금융 경제 프로그램 담당 피디가 되었다.


매주 은행 CEO, 애널리스트, 정부 관계자들을 인터뷰하고 편집해서 30분짜리 방송을 내보냈다.


생소한 금융 용어와 싱가포르 정부 정책보다 더 어려웠던 점은, 피디 일을 하면서 접하는 추파와 성희롱에 대처하는 일이었다.


인터뷰했던 인도계 애널리스트는 남자친구 유무에 대해서 물어보거나 한국 여자들에 대한 편견 가득한 끈적한 말을 하곤 했다.


사십 대 중반 중국계 싱가포르인 교수는 처음 만난 날, 그가 쓴 책을 잘 읽었다는 칭찬을 오해했는지, 정말 불편한 말들을 쏟아냈다.


예를 들어, 스몰 토크로 곧 이사 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더니 자기 집에 방이 남는다고 같이 살자면서 집 내부와 창가 뷰 사진을 계속 문자로 보냈고, 그 후에도 끊임없이 문자를 하며 집착했다. 왓츠앱 (해외 카톡)에서 블락을 하면,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하며 메시지를 보냈고, 거기서 블락을 하면, 링크드인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똥을 피하고 싶었지만, 특정 업계의 한정된 인력 풀 때문에 내 인터뷰이 선택지는 다양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선은 넘지만 법에 저촉되지 않을 정도의 줄다리기에 능했다.


사실, 22살 외노자는 법도 잘 모르고 세상도 잘 몰랐다. 좀 더 ‘머리가 큰’ 어른이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안타깝게도 회사 밖보다 더 불편한 곳은 회사 안이였다.


중년 카메라 맨들은 촬영 때 커피를 사 오지 않았다고 자주 툴툴거렸다 (또래 남자 피디에게 커피 심부름을 요구받냐고 슬쩍 물어봤더니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들은 연륜이 있어 ‘할 말은 하는‘ 여성 피디들을 뒤에서 자주 욕했다. 수틀리면 촬영에 비협조적이었다. 젊은 여성 피디들은 자연스럽게 알아서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췄다. 나 포함이다.


하루는 영상 ingest를 담당하는 중년 아저씨에게 고맙다고 악수를 청했다. 내가 찍어온 영상을 그가 포맷 변환을 해줘야지 영상 편집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잦은 감사인사는 필수였다.


악수를 청하자 그는 손가락으로 꼬물꼬물 나의 손바닥 안을 간지럽히며 씩 웃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찜찜한 마음에 동료 싱가포르 피디에게 말했더니 성적인 의미가 내포된 행위라고 했다. 어깨까지 오는 기름을 잔뜩 바른 구불구불한 머리와 손을 잡으며 지은 찐득한 미소를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회사 안 밖에서 성차별과 성희롱을 당했지만, 처음에는 성희롱이라고 인지를 하지 못했다.


주위의 지속적인 가스라이팅 때문이었다.


상사들에게 성희롱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지만 그저 ’ 장난‘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과민반응 하지 말라는 핀잔까지 들었다.


심지어 과민반응 하지 말라던 상사는 여성이었고 2차 가해까지 서슴지 않았다 (“네가 일부러 관심을 받으려고 그러는 것 같아,“ 왜 헐렁한 옷만 입니? 슬프고 우울하고 못난 사람들이나 너처럼 옷을 입어 “ 등등. 수많은 어록이 있다).


돌이켜보면, 가해자의 성별을 떠난 방송국의 곪고 곪은 여성혐오적 문화와 시스템의 문제였다.

 

하지만 어리숙한 사회 초년생이자 외노자였기 때문에 그 당시 ‘불쾌한’ 경험이 반복되어도 자신있게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지만 혼자 삼키는 일이 잦아졌다. 동료들에게 이해받기는 커녕 갈수록 오해를 사는 것 같았다.


상사들과 친한 피디들까지, 내가 ”장난을 못 받아들인다, 운이 안 좋다“에서 심지어 ”싱가포르 문화를 ’이해 못 해서‘ 오해를 하는 것 같다“ 라는 말까지 자주 했다. 용기 내서 피해 사실을 공유했을 때 그런 말을 들으면 억울해서, 그리고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내 안에서 ‘잘못’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아주 오랫동안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도대체 내 잘못은 무엇일까?”


“내가 싱가포르 문화의 어느 부분을 이해 못 하는 것일까?” “내가 그렇게 불편할 정도로 진지한 사람인가?”

“드레스가 짧았나?” “과잉친절이나 오해살만한 행동을 했나?”


뾰족한 화살을 내게 돌리는 것은 쉬웠지만 동시에 아팠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화살을 겨눌 곳이 안 보였다. 나는 그냥 회사에서 ’ 운이 안 좋고, 장난을 못 받아들이고 싱가포르 문화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내 자신을 찌르고 또 찔렀다.




사실 피해자는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모두가 한 때 피해자였을 것이다.


당시 일기를 보면 왜 여성 피디들이 한결같이 매우 짧은 숏커트를 하고 남자처럼 옷을 입는지 알 것 같다고 적혀있다.


아마 성적대상화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친한 피디 언니는 “인생이 쓰디쓸 때” 위스키를 마시게 된다고 했다.


맥주만 알던 나는 방송국 입사와 함께 곧 위스키에 입문했다. 그리고 덤으로 우울증과 자기혐오를 얻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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