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won Jul 31. 2023

직장동료가 내 가슴에 대해 평가했다

어쩌다 정신병원 (20)


반복된 성희롱에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쯤, 어느새 이년 차 피디가 되었다.


하지만 성희롱은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2017년 10월 어느 날, 또다시 동료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인간이기에, 폭발했다. 결과적으로 내 삶과 커리어도 같이 산산조각 났다.




내 인생을 바꾼 하루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매주  두세 번, 인터뷰를 하러 싱가포르의 금융허브 라플스 키 (Raffles Quay)로 향했다.


촬영 전날이나 당일에 취재를 같이 갈 카메라 맨이 랜덤으로 배정되는 시스템이었는데, 사건 당일, 조금 친분이 있던 D모씨가 배정되어 안도를 했던 기억이 있다.


마리나 베이가 한눈에 보이는 51층 사무실 뷰에 감탄하며 인터뷰이를 기다리는 동안 오디오 맨과 D모씨와 같이 셀피도 찍었다.


그날 찍은 사진


인터뷰는 별문제 없이 끝났다.


인터뷰 후 보통 Cutaway를 촬영한다 (한국 방송국 용어를 잘 몰라서 그냥 영어로 쓴다. 양해 부탁드린다).


피디가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을 짧게 촬영해서 인터뷰 중간중간에 넣어 편집한다.


실제 촬영했던 cutaway 장면


컷어웨이 촬영 전, D모씨는 내 얼굴 맞은편에 엄청 큰 조명을 놓았다.


촬영을 해도 겨우 몇 초만 사용하기 때문에 평소에 조명 없이 찍거나 작은 조명을 사용해왔다. 갑자기 달 같이 밝고 큰 조명 앞에 앉으니 눈이 시렸다.


“아나운서들은 어떻게 이런 촬영을 매일 하지? 진짜 조명이 너무 밝은 것 같아. 근데 이런 큰 조명 앞에 서 있으니 아나운서가 된 기분이네. “


D모씨가 말했다.


“근데 너는 가슴이 작아서 아나운서가 될 수 없어~“


많은 종류의 성희롱을 겪었지만 이렇게 적나라한 성희롱은 처음이어서 순간 멍해졌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선을 넘은 그에게 되받아쳤다.


“그건 sexist 해! (성차별적이야!)“


“Sexist 하지 않아. 사실이거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이 싫어서 대화 주제를 전환했다.


“이번 인터뷰이한테 항상 많이 배우는 것 같아~ 앞으로 ’더‘ 어른이 된다면 이분같이 ‘스마트’해지고 싶어. “


D모씨가 갑자기 또 급발진을 했다.


“여자들은 본인들을 위해 스마트하면 안 돼. 너 좀 멍청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어. “


평소 같으면 그냥 웃고 넘겼겠지만 그는 그날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그건 진짜, 진짜 성차별적인 발언이야.”


“넌 그게 사실인 거 알잖아. 진짜 사실이야. “




그날 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온갖 생각과 감정이 섞여서 머리가 복잡했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 적도 없고 되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왜 난리인가 하는 일차원적 생각부터, 고작 이런 대우를 받으려고 외노자로 힘들게 일하나 하는 자괴감, 그리고 동료에게 일터에서 가슴을 평가당했다는 수치심과 모욕감이 밀려왔다.


다음 날, 그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네가 내게 한 말을 어젯밤 생각해 봤어. 잊어버리려고 했지만 정말 옳지 않은 말이었던 것 같아.
너는
1) 내가 가슴이 없어서 아나운서가 못 된다고 했고
2) 나와 여자들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 멍청한 척을 해야 된다고 했어.
네가 나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네가 한 말 중에서, 가슴”을 “성기”로, “여자”를 “남자”로 바꿔서 다시 네가 한 말을 반복해 봐.
많은 사람들이 너의 발언을 되게 불쾌하고, 모욕적이고 성차별적이라고 생각할 거야. 너는 장난이라고 말했지만, 그 발언은 내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한 노력에 대한 모욕이야. 그리고 동료가 이런 식으로 나를 생각하고 대한다니 너무 불편하네.
나는 회사를 떠나겠지만 (노트: 이직 준비 중이었다) 앞으로 모든 여성에게 네가 한 발언을 절대 다시 안 했으면 좋겠어. 내가 상처받은 것만큼 그들도 똑같이 상처받을 거야.
읽어줘서 고마워. “


그의 답변에 기가 찼다.


“장난이었는데 네가 상처받았다면 미안 […] 근데 나는 호주인이야. 아시아에 있다는 것을 깜빡했네. “


(참고로 그는 호주에서 고작 몇 년 살았던 중국계 싱가포르인이다. 그리고 호주인이라고 성희롱을 해도 된다는 법은 없다).


“그 발언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할게. 내게 일부러 무례하거나 성차별을 한 것은 아니야. 그냥 업계에 대해 말한 거야. 너 가기 전에 점심이나 커피 살게.
아, 곧 추석이다. 오늘 밤 달 보러 가. “


달을 보러 가라는 ‘사과’의 마무리


진지하게 미안하다고 했으면 넘어가려고 했다.


가스라이팅과 변명이 짬뽕된 사과 아닌 사과는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바로 상사에게 문자를 보여주고 상황 설명을 했다.


“너 혹시 그를 자극할만한 행동을 했니?”


중년 아저씨 상사가 처음 한 질문이다.


“아니요?!!!!”


“그래서 내가 뭘 해주길 원하는 거야?”


“그건 잘 모르지만 제 상사라서 도움을 청하러 온 거예요.”


“문제제기를 하려면 네가 적어서 보내주던지 해.”


“이미 작년에도 비슷한 문제제기를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바뀐 게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요!“


“인사과 가려면 정확한 팩트 적어서 가야 된다.“


그는 마치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 일인 듯 도움 안 되는 조언을 주고 대화를 끝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같은 팀에 있는 30대 후반 피디에게 일어난 일을 말했다.


그의 반응은 더 기가 막혔다.


“안타깝지만… 네가 이런 일을 ‘차분히’ 견딜 수 있어야 돼. 솔직히 여기 모든 여자 피디들이 겪는 일이고, 그게 현실이야. 이게 불편하면 AWARE 같은 여자만 있는 NGO 가서 일해.“


평소에 알 던 사실이지만 그 순간, 가슴 깊이 깨달았다.


이곳에, 내 편은 아무도 없구나.


to be continued.


너무 억울해서 올린 그 날의 인스타 스토리. 같이 분노해주는 사람들은 머나먼 곳에 있는 친구들 뿐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어쩌다 미투의 시발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