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정신병원 (21)
‘관상은 사이언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매스컴에서 접하는 가해자들에게 대중이 기대하는 특정 이미지가 있다.
방송에 나오는 가해자는 대부분 어두운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패딩 안에 몸을 꼭꼭 숨긴 채 법원에서 나온다.
성희롱 가해자 D모씨도 ‘멀쩡한’ 동료 중 한 명이었다.
유쾌하고 쉽게 불평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같이 일하기 수월했다. 오랫동안 방송국에서 일했기 때문에 사람들도 많이 알았고 그 안에서의 평판도 썩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회사 동료들이 나를 믿지 않거나,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다.
그와 페이스북 친구가 아니었지만, 겹치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해당 글을 전체공개로 설정하면, 알고리즘을 통해 그의 피드에 내 글이 노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센스 있게 D모씨의 이름은 지워서 올렸다. 목적은 그를 공개적으로 매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본인의 말을 다시 곱씹어보고 사람들의 코멘트를 보며 약간의 창피함 정도 느끼길 바랐다.
혹시나 해서 스크린샷이나 개인 프로필에 방송국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재차 확인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포스팅 버튼을 누르고, 계획해놓은 휴가를 위해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홍콩에 도착해서 핸드폰을 켜보니, 계속에서 띵- 띵- 띵 - 띵 하는 알람이 울렸다.
몇십 개의 메시지와 전화가 와 있었다.
안부를 물어보는 친한 피디들의 문자가 먼저 보였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뭐 비행기 사고가 났나? 스팸링크인가?
뭐…. 지…?
싱가포르에서 제일 큰 신문사와 유명 온라인 매체, 심지어 주로 가십을 다루는 1인 신문사까지 나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다.
언론인으로서 사람들이 ‘기레기’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억울할 때가 많았지만, 알고 보니 세상에 ‘기레기’들은 명백히 존재했다.
기자들은 동의 없이 페이스북과 다른 소셜미디어에서 긁어모은 사진들과 개인정보를 기사에 실었다.
어떤 매체는 화제성을 위해 링크드인에 있는 이력을 대충 짜깁기 해서 기사를 냈는데, 심지어 내가 “북한에 간 경험이 있다”라는 말도 안 되는 내용까지 있었다. (국정원이 내 문 똑똑하면 책임질 것인가…)
심지어 일방적으로 가해자를 옹호하는 ‘익명’ 방송국 관계자를 인터뷰해서 그쪽 입장만 받아 적은 ‘팔이 안으로 굽은’ 기자도 있었다 (이런 일에 양쪽 입장을 듣는 것은 취재 기본 중 기본이다).
밀려오는 문자와 늘어나는 기사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다 보니 놀라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갑자기 회사 높은 분에게 전화가 왔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받았다.
그녀는 매우 친절한 목소리로 괜찮냐고 물어본 뒤, 바로 페이스북 글을 삭제하라고 했다.
갑자기 정신이 바짝 들었다.
“저는 회사와 동료의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규정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
상사의-상사의-상사는 계속 글을 삭제하라고 강요했고 나는 일단 ‘비공개’로 돌리겠다고 했다.
절대 다른 매체와 인터뷰를 하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앞이 깜깜했다.
그냥 일개 방송국 피디의 사연을 싱가포르 언론이 앞다투어 보도한 이유가 있다.
기가 막힌 타이밍 덕분이었다.
페이스북 글을 올린 다음 날 (2017년 10월 5일), 뉴욕 타임스는 할리우드 거물 하비 와인스틴이 수십 년간 성추행을 저질러왔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수많은 배우와 영화계 관계자들이 와인스틴에게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고 토로한 후 미투 (#MeToo) 운동이 폭발적으로 시작되었고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흐름에 휩쓸려 어쩌다 보니 수천 킬로 떨어진 싱가포르에서 미투를 하게 된 샘이다 (내가 하루 빨랐으니 선구안이 있었던 것일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