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정신병원 (23)
일반적으로 외신에서 기사를 쓸 때 꼭 두세 명의 ‘전문가’를 인용해야 한다. 일반 인터뷰이도 마찬가지다. 균형이 잡힌 정확한 정보 전달이 목적이다.
문제는, 개인적인 의사결정에도 직업병의 유산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미피 인형 구매부터 회사 퇴직까지, 꼭 두세 명한테 물어보고 ‘평균치’를 내거나 다수결로 결정한다. 해당 분야의 ~권위자~ 의견은 좀 더 가중치를 둔다. 정신과 의사의 조언을 친구에게 전하면 “그거 내가 예전부터 계속해왔던 말이잖아!”라며 답답해한다.
다행히 이렇게 사소한 결정도 내리기 어려워하는 내 곁에 가끔 인생 조언을 해주시는 은사님이 몇 분 계시다.
서른을 앞두고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서 교수님과 줌으로 미팅을 했다. 수업 밖의 나를 잘 모르시는 분이지만, 인생 선배에게 궁금한 점이 많았다.
근황을 물어보시더니 요즘 참 ‘걱정’이라고 하셨다. 이번 학기에, 나처럼 정신병원에 입원한 학부 학생이 두 명이다 된다면서, 인생은 참 어렵고 힘든데 벌써 힘들어하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구구절절 설명하려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장점은, 생각보다 고집이 별로 없어서 다른 의견을 잘 수용한다. 단점은, 청소기같이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는 것이다.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괴감이 들었다.
세상에 힘든 사람이 참 많은데, 괜히 철이 없어서 한탄만 하나, 내가 나약하나 등등, 조금 극복했다고 생각한 자기혐오와 불안함이 몰려왔다.
교수님은 벌써부터 쉽게 무너지면 안 된다고 하셨다. 물론, 덕담이고, 좋은 의도를 가지셨을 것이다.
모든 상처와 아픔을 구구절절 인증하면, 넘어져도 이해를 받을 수 있을까?
아마 이해보다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교수님은 한국 사회에서 나처럼 공개적으로 아픔을 보이면, 본인은 ‘이해’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오해를 해서 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어쩌면, 이 글을 쓰는 목적도 아픔을 정당화시키고 나 자신을 설득시키는 과정일 수도 있다.
아플만하다고. 이 정도면 아플 자격이 되지 않냐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충분치 않나 보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