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개월 금주 프로젝트 - 1
매주, 담당 주치의 쌤에게 외래 진료를 받으러 간다.
(정신과 쌤과 입원 에피소드는 전 글 참고).
이번 주는 매일 안개가 짙은 나날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몇 시간을 낭비하고, 근래 다시 시작한 운동도 하지 않았다. 학습된 자괴감과 무기력함 사이로 다시 서서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저 이번 주는 딱 두 번 마셨어요. 한 번은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진저에일 하이볼을 타 마셨고, 한 번은 친구 오빠 웨딩에서 과음을 좀 했어요.“
“모르겠는데요.”
????
“네?”
당황스러웠다.
일단 ‘금단현상’이라는 단어 자체가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쓰는 용어라서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중독’ 치료 전문가 셔서 좀 더 ‘과하게’ 생각하시는 게 아닐까요?”
“아닙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어갔다.
(참고로 이 ‘협박’이 먹히는 이유는, 면담이 없으면 필요한 약을 처방 받을 수 없다…)
의사쌤은 전과 다르게 매우 단호해 보였다.
“술 때문에 요즘 치료에 진전이 없습니다. 왜냐면 술을 계속 마시니까 계속 감정이 ‘언스테이블 (unstable)’ 하잖아요. 이 상태에서 하는 대화는 큰 의미가 없어요. 계속 대화가 겉돌고 있어요 감정 컨트롤이 안되니까. “
시작도 안 했지만 삼개월이라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왜 삼 개월이죠? 한 달도, 두 달도 아닌, 왜 삼 개월이에요?”
술 찌꺼기라니…
의사 쌤은 첫 이주는 매우 힘들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머리도 아프고, 감정도 더 요동치고 우울할 것이라고 하셨다. 평생 끊는 것이 아니라는 ‘위로’ 한 스푼도 더해주셨다.
선택지를 주시지 않으니 고를 답도 없었다.
“휴… 네…”
자신 없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왔다.
복직 후 스트레스가 서서히 쌓여가던 요즘, 매일 밤 10시쯤이면 주방 옆에 있는 선반에 눈이 갔다.
투명한 선반 위에는 지금까지 모으거나 선물 받은 각종 위스키, 진, 기타 주류들과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핀란드에서 사 온 편백나무 숲 향이 나는 진 (gin)이랑 도쿄에서 온 로컬 elderflower 엘더플라워 진. 베프가 발리에서 사다 준 술 (이름 까먹음), 그리고 랜덤하지만 영국 기자한테 선물 받은 오리지널 made-in-평양 머그컵 (정치학 전공 취향저격).
일본에서 공수해 온 Nikka 니까 싱글 몰트 위스키 (peaty & salty 버전. 너무 맛있어서 아껴 마시는 중), 니까 블렌디드 위스키, 진저에일 하이볼을 제조할 때 사용하는 블랙라벨 위스키, 바에서 가져온 파도가 그려진 위스키. 그 사이에 자리한, 광안리 모래사장에서 가져온 진주 같은 조개껍질이 담긴 컵과 바다 사진 등등.
나의 취향과 애정이 오밀조밀 담긴 공간이다.
요즘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지 매일 밤 선반에 눈이 갔다.
업무를 끝내고 난 후의 뇌는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 찬 사우나 같다.
그때 술을 한잔 마시면, 스—으 하고 사우나 문 사이로 스팀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이완이 되면서 기분까지 살짝 좋아진다.
동생이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풀라고 잔소리해서 한 말이 있다.
drinks= immediate joy
working out= immediate muscle pain
술: 바로 행복
운동: 바로 근육 통증
매번 즉각 느낄 수 있는 도파민을 선택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후,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알코올 중독’을 네이버에 쳐보니 알코올 의존 검사가 눈에 들어왔다.
세계보건기구 WHO에서 개발을 했다고 하니 속는 셈 치고 한번 쳐보기로 했다.
1번: 얼마나 술을 자주 마십니까?
- ‘주 4회’
이 항목을 체크하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마시지는 않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 “술 좀 줄이세요~”라고 말해주신 바텐더님이 생각났다. 4회가 맞는 것 같다.
2번: 술을 마시면 한 번에 몇 잔 정도 마십니까?
- 음… 모르겠네…
소주는 거의 마시지 않아서 선택지를 보고 난감했다.
보통 위스키 위주로 마시기 때문이다 (싱글 몰트 위스키를 좋아하고 위스키는 숙취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좋아한다).
그래도 이왕 하는 검사 제대로 하기로 했다.
어떤 훌륭한 분이 만드신 주량 계산기를 찾았다.
보통 한 번에 위스키를 니트로 (얼음 없이) 세잔 정도 마시는데, 저 주량 계산기에 따르면 위스키 세잔이 소주 7잔, 약 0.6병 정도라고 한다 (생각보다 심하지 않아서 안도했다).
하지만 검사 결과를 보니 안도감은 서서히 증발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매일 소주를 한 병씩 마시지도 않고,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겨본 적도 인생 통 틀어서 거의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40점 만점(?)에 22점이니, 이 정도는 나쁘지 않네 하다가 5점 이상부터 음주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부분을 읽으니 살짝 ‘경각심’이 들었다.
치료가 필요하다는 문구는 당황을 넘어 황당하기까지 했다.
문득 의사쌤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보통 숙취 없고 술 잘 마신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거예요. 왜냐면 그렇게 자만하고 마시다가 중독되는 거예요. 술 잘 못 마시는 사람은 술 마신 다음날이 너무 힘들어서 애초에 그렇게 안 마셔요.“
큰 일을 하려면 워밍업, 즉 준비기간이 필요한 법이다.
진료 당일 밤, 친구와 망원동에서 위스키와 하이볼을 마시며 그다음 날부터 시작될 삼 개월간의 금주를 위해 건배했다. 마지막으로 마신다고 생각하니 한모금 한모금 사라질 때마다 너무 아까웠다.
다음 날 아침, 선반에 있는 모든 술과 잔을 주방 구석 캐비닛에 넣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 위에 쪽지를 붙였다.
to be continued
++ 어젯밤, 남산 산행 후 기네스가 아른거렸다. 유독 긴 삼 개월이 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