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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Dec 03. 2023

“일하는데 인성이 어딨어!“

영상 기자의 비애

외신에는 video journalist 비디오 저널리스트라는 직책이 있다.


지금 나의 직책은 ‘에디터’이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비디오 저널리스트에 가깝다. 취재를 가서 직접 촬영과 편집을 하고 짧은 기사를 쓴다.


명확히 영상 / 펜 기자가 나뉘어 있는 한국 방송국과는 다른 시스템이다.




문화부 기자다 보니 주로 레드카펫이나 시사회 등을 가서 촬영을 하는데 늘 카메라는 많고 자리는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항상 행사 시작 시간보다 두 시간 정도 일찍 콜타임이 잡혀서 대기를 해야 한다.


일찍 일어나는 새는 벌레를 잡지만, 영상기자는 일찍 도착한다고 해서 매번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한다.


여기서 좋은 자리란, 촬영하기 좋은 앵글이 나오는 자리다.


사이드 자리가 안 좋을 때: 패널들을 다 담을 수 없는 무대 촬영


자리싸움을 방지하기 위해 홍보 업체는 이벤트 한두 시간 전 명함 추첨을 한다. 명함이 더 빨리 뽑히려고 일부러 명함 종이를 두껍게, 아니면 좀 더 크게 프린트한다는 소문도 들릴 만큼 촬영 자리는 중요하다. 자리 운이 없는지 항상 40번대가 뽑힌다.


보통 내신 방송국에서 두세 명이 나눠 들고 오는 삼각대, 사다리, 방송 카메라, 조명, 마이크 등을 혼자 이고 지고 가서 자리 추첨까지 하면 이제 눈치 싸움 차례다.


이제 눈치 싸움 차례다.


추첨 후 이름이 불리면 재빠르게 눈알을 굴려 삼각대를 들고 좋은 자리를 향해 달려야 한다. 삼각대를 내려놓는 순간 암묵적으로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된다.


늦게 이름이 불리면 무한 ‘죄송합니다’를 외치며 삼각대와 삼각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거나, 시야를 가리는 타 방송국의 카메라를 피해 삼각대를 나의 키 1.5배로 올리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위에서 앵글을 잡아야 한다.


이렇게라도 자리를 잡을 수 있다면 괜찮은 날이다


운과 노력이 철저히 나를 배신하는 날이 가끔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한 행사 취재를 갔다.


백 명이 넘는 취재진이 몰렸지만 명함 추첨은커녕 촬영 공간 자리도 기자회견 시작 전까지 계속 바뀌었다.


두세 명이 움직이는 내신 방송국은 이럴 때 촬영이 가능할 것 같은 곳에 인원을 유동적으로 배치해서 자리

선점을 한다.

 

그날도 일찍 와서 사다리로 자리를 맡아놓았지만 돌아와 보니 중국 기자들이 어느새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장소가 협소해서 비집고 들어가기 불가능했다.


처음에 홍보 업체 쪽에서 촬영이 안 된다고 남겨놓은 자리를 보니 타 방송국 카메라들이 점령했다 (이렇게 룰이 ‘유동적‘일 때가 많다…).


기자 회견 약 10분 전,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중국 기자들 뒤에 삼각대를 세우니 홍보 담당자가 와서 자리를 옮기라고 했다. 펜 기자들이 서서 질문할 공간을 만들어야 된다고 했다.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질문할 공간은 충분해 보였고, 맡아놓은 자리도 뺏겨서 도저히 갈 곳이 없었다. 앞에 중국 기자들한테는 언어가 안 통해서 그런지 옮기라는 말이 없어서 더 억울했다.


거듭 옮기기가 어렵다고 공손히 말씀을 드렸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숨을 길게 들이마신 뒤 살짝 숨을 참고 속사포로 말을 내뱉었다.


“왜 저만 옮기라고 하시는 거죠? 불공평하네요” 등등. 굳이 다 적고 싶지 않다.


눈에 힘을 주고 평소 절대 쓰지 않는 톤과 단어로 따지고 들었다.


홍보 담당자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준다고 바닥에 있는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촬영이 끝나고, 현타가 몰려왔다.


그날 취재를 도와주러 온 오빠는 성격이 안 좋아야 기자를 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 본업을 할 때 멋있다 ‘라는 일반적인 말은 내게 해당이 되지 않는다. 본업을 할 때 나오게 되는 긴장감과 초조함이 섞인 표정과 공격적인 말투는 전혀 멋있지 않다.


내면의 공격성을 끄집어내어 과도하게 팽창시켜야 하는 촬영이 끝나면 후유증은 오래간다.


촬영이 ‘성공’적으로 끝나도 며칠 동안 마음이 어지럽다.


아무리 업무지만 특히 나보다 열 살 스무 살 많은 사람에게 일부러 불쾌함을 드러내는 강한 말투와 단어로 따지는 일은 내게 죄책감을 선물한다.


눈과 말에 힘을 주고 말하는 방식을 선택해야지만 협조를 받아낼 수 있는 상황에 무력감과 자괴감을 매번 느낀다.  




처음에는 운이 나빠서 이런 일을 겪는지 알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만만해 보여서 ‘ 이런 일을 겪는지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업계 관행이었다.


내신에서는 공채로 채용된 기자들에게는 ‘깡‘을 교육한다고 한다 (지금 거의 폐지된 ‘마와리’도 그의 일부다).


그중 하나가 항의하는 법이라고 한다.


인터뷰를 거절당하면 다시 부탁하기보다는 바로 전화를 걸어 왜 모모 언론은 되고 우리는 안 되는지, 지금 우리를 차별하는 것이냐고 목청을 높여 따지고 들면 인터뷰가 성사된다고 한다 (모든 매체가 이렇다는 일반화는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케이스는 공채 출신 내신 기자에게 들은 말이다).


실제로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상황을 경험한 적도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촬영을 갔을 때, 왜 본인 인터뷰 순서가 늦냐면서 ‘차별’하는 것이냐고 눈을 부라리며 대놓고 성질을 냈던 모 언론사 기자가 있었다. 홍보 담당자는 나한테 거듭 사과를 하며 그 기자와 나의 인터뷰 순서를 바꿨다.


외신에서도 물론 인터뷰 경쟁은 치열하다.


하지만 외국 홍보 담당자와 소통을 할 때 공격적인 단어 사용이나 적나라하게 무례한 태도는 득보다 실이 많다. 그렇게 해서 성사되는 인터뷰도 아직 본 적이 없다.


물론 푸쉬를 하기는 한다, 단호한 어조로.


단호함과 무례함은 한 끝 차이다.




기자 선배들에게 고충을 토로하니 이 업계에서는 나이스하게 부탁하는 사람만 ‘호구’가 된다는 조언이 돌아왔다.


내 인성이 구려질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더니 몇십 년 경력의 선배가 웃으면서 말하셨다.


“일하는데 인성이 어딨어!”


일과 인성은 섞이지 못하는 기름과 물일까.


다음 주 촬영을 앞두고 마음이 무거워져서 끄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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