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g Hwan Kim Oct 04. 2018

조덕환 - 인생 (人生)

‘들국화’의 창단 멤버, 그가 남긴 7곡의 소중한 노래들을 담은 遺作

# 이 글은 루비레코드에서 2018년 10월 4일 음원 발매/이후 CD, LP로도 발매하는 조덕환의 유작 앨범 속 해설지로 작성된 글입니다.  


‘들국화’ 전설의 탄생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던 뮤지션 ‘조덕환’

다시 먼 길을 떠난 그가 남긴 7곡의 소중한 노래들을 담은 유작(遺作), [人生]


들국화 출발의 한 축을 담당했던 조덕환. 그가 남긴 유작들이 드디어 다듬어져서 음반으로 공개된다는 이야기를 루비 레코드 관계자를 통해 처음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너무나 허무하게 그가 떠났다고 생각해 마음속으로 아쉬움을 갖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렇게라도 그의 유작(遺作)들을 통해서라도 그의 목소리와 음악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결과물을 만나기 전부터 개인적으로는 반가웠다. 그리고 실제 그 결과물들과 처음 조우했을 때, 더욱 놀라웠다. 이런 좋은 곡들을 남겨놓고서 그가 그렇게 빨리 우리 곁을 떠나야 했다니. 2015년 8월 십이지장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했지만 결국 2016년 11월 14일 새벽 4시, 병마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솔로 2집을 스스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던 그의 한계를 생각할수록 ‘인생’의 무상함에 대한 상념은 더욱 짙어진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남은 그의 새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으로 불행 중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아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도 동시에 스치기에, 이 글을 쓰면서 기쁨과 슬픔이 복잡하게 교차한다.


들국화의 탄생 속에서 서구 록의 정체성을 한국적으로 더해냈던 뮤지션 조덕환


고려대학교 출신 밴드 고인돌의 멤버로 1978년도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조덕환은 동상을 차지한 참가곡 ‘날개’의 작곡가 이영재와도 듀엣 ‘조·이’라는 듀오를 결성해 라이브 클럽들을 돌며 공연을 했다. 그러던 중 포크 그룹 따로 또 같이를 막 그만두었던 전인권이 서울 비원 앞에 있었던 한 카페에서 연주하던 듀오 조·이를 보게 되면서 그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결국 그 인연으로 나중에 전인권에게서 그가 허성욱, 최성원과 함께 1983년 결성한 밴드 들국화에 합류할 것을 제의받았다. 2011년 씨네 21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가 합류했을 때는 최성원은 전인권과의 갈등으로 잠시 떠나  있었고, 그들은 삼청동 전인권의 집에서 연습하며 팀워크를 맞춰갔다고 한다. 이후 동숭동 파랑새소극장 장기 공연부터 최성원이 다시 들어와 4인조로 이태원 클럽 ‘라이브’ 등을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갔다고.


이후 음반 데뷔를 준비하던 들국화의 멤버들은 전인권이 음반을 낸 적이 있었던 지구레코드로 가려는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중 우연히 광화문 쪽에 있는 한 음반점에 들렀다. 그리고 그곳의 주인이자 막 동아기획을 설립해 김현식, 우순실, 조동진의 음반을 기획한 김 영 사장을 만나 계약금 2천만 원에 봉고차 한대를 받고 그와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1985년 9월 밴드의 데뷔작 [들국화Ⅰ]을 세상에 선보였다.


방송 출연은 거의 없었지만 소극장과 공연 무대를 통해서 자신들의 입지를 다진 들국화는 전인권의 포효하는 보컬을 앞세운 ‘그것만이 내 세상’과 ‘행진’, 또는 최성원의 감미로운 보컬이 두드러진 ‘매일 그대와’ 등으로 1980년대 소위 ‘언더그라운드 뮤직’의 스타 밴드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그들이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은 시점이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이 밴드의 멤버가 아니었다. 1집 발표 후 6개월 만에 그룹 내에서의 음악적 견해의 차이와 함께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그의 아버지와 형이 당시 공무원이어서 전두환 군사정권 하에서 그의 대중음악 활동이 그들의 직위에 영향을 줄까 아버지는 그의 음악 활동을 지속적으로 반대했다)에 짓눌려 더 넓은 세계 속에서의 음악적 배움을 꿈꾼 조덕환은 밴드를 떠나 뉴욕으로 날아가 버렸다. 결국 사람들은 들국화라는 밴드를 추앙했지만, 그의 이름은 빠르게 기억 속에서 망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네 멤버의 음악 역량이 각각 큰 빛을 발하며 완성된 들국화 1집에서 그 가치의 1/3 이상의 지분은 분명 조덕환에게 있었다. 로큰롤, 블루스, 포크 등의 서양의 고전적 대중음악의 감성을 잘 이해하면서도 이를 들국화의 음악에 역동적으로 도입하는 데에 그는 탁월한 역량을 보여줬고, 그 결과물은 그가 작곡한 들국화의 노래들 - ‘세계로 가는 기차’, ‘축복합니다’, 그리고 전인권이 그의 솔로작에서도 노래한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등에서 충분히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음악 저널리스트로서의 기억들로 되돌아본 2009년 귀국 이후 그의 행보


개인적으로도 그가 만든 곡들을 좋아했지만 그저 밴드의 역사 속의 한 멤버로만 기억하고 있었던 2009년, 언론과 음악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서 그의 이름이 다시 들려왔다. 그가 오랜 미국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그는 최성원, 주찬권 등을 설득해 들국화의 재결합을 시도했지만, 전인권의 건강 상황으로 인해 2000년대 말 시점에서는 그 시도는 불발로 끝났다. 그리고 2010년, 그는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무대에 서서 자신의 귀환을 대중에게 제대로 선보였다. 현장에서 관객으로서 보았던 그의 무대 위 모습은 조금은 이런 공간에 낯설고 수줍은 것 같으면서도 꿈꾸던 고국의 무대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처음 공개했던 자신의 음반에 들어갈 신곡들 역시 들국화 시절의 그의 노래들을 연주할 때 못지않은 강한 임팩트를 주었다.


결국 2011년, 루비 살롱 레코드를 통해 발매된 그의 첫 솔로 음반 [Long Way Home]을 통해 그때 들었던 음악들의 완성된 실체를 비로소 만났다. 그가 긴 세월 동안 타향에서 체득하고 확인했던, 고전적 포크 록/블루스/서던 록의 본류를 더 치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들국화 시절부터 지켜온 그의 고유한 멜로디의 힘이 유지된 음반이었다. 그의 보컬이 주는 칼칼한 매력과 함께 과거의 전우들(최성원과 주찬권)을 비롯해 기타리스트 박상도와 베이시스트 한두수 등 인디 씬의 후배들의 세션을 통해서 완성된 사운드도 먼 길을 돌아온 한 중견 뮤지션의 귀환을 알리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싱글 ‘고향 가는 길’(2011)을 발표한 이후 그의 소식은 다시 뜸해졌다. 그리고 2012년 전인권-최성원-주찬권으로 재결합한 들국화의 라인업에도 그의 이름은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2013년 8월, 지금은 사라진 홍대 옆 음악 카페 겸 클럽 핑크 문(Pink Moon)에서 그의 공연이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 시간을 내어 관람을 하러 갔다. 그는 30분 정도 되는 짧은 공연 동안 자신의 어쿠스틱 기타와 키보드 세션을 바탕으로 자신의 들국화 시절, 그리고 솔로 앨범의 곡들, 그리고 아직 미공개한 곡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들려주었다.


소속 매체를 위한 사진 촬영을 부탁드리면서, 그에게서 후속 음반을 준비하기 위해 새로운 데모 음원들을 만들고 있으며, 다 완성된 후에 발매해 줄 매체를 찾으려고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 이후 2년이 훨씬 넘도록 그의 신곡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결국 2016년 2월이 되어서야 이번 신보에는 다른 버전으로 실린 곡인 ‘Fire in the Rain’만이 디지털로 공개되었다. 그리고 6월에는 네이버 온스테이지에 올라온 그의 라이브 영상을 만난 후 5개월 만에 페이스북 타임라인과 뉴스를 통해서 그의 부고를 들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궁극의 목표를 다 완수하지 못한 채 다시 먼 길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마지막 음악적 열정이 담긴 홈 레코딩 음원들 중 7곡을 다듬어낸 솔로 2집, [인생]


생전에 조덕환과 1집의 밴드 마스터이기도 했던 한두수는 두 번째 앨범을 준비하면서 피아니스트 김하나비를 영입해 창작 작업을 계속 이어갔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음악적 교감이 진행되는 가운데 스튜디오가 아닌 한두수의 자택에서 어쿠스틱 기타/피아노 중심의 편곡에 기반한 데모 버전 형식의 녹음이 이뤄졌다고 한다. 그 결과 총 20여 곡 정도의 데모 버전들이 녹음되었고, 고인의 부인과 루비 레코드의 기획 아래 그 가운데서 온전히 그의 음악적 지향과 의도가 잘 표현된 곡들이 데모 세션에서 함께 했던 두 연주자와 몇몇 보조 뮤지션들의 손을 통해 다듬어져 최종 7곡이 이번 솔로 유작 [인생]을 통해 첫 선을 보이게 되었다.


전체적인 음반의 결과물은 고인과 김나하비, 그리고 한두수가 처음 녹음했던 데모 음원 속의 기본 편곡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거라 느껴질 만큼 정갈한 어쿠스틱 포크/팝/록의 정서 속에서 완성되었다. 이러한 미니멀리즘의 향기 속에서 과거 들국화 1집의 추억들이 살아날 정도로 고인이 작곡한 멜로디는 여전히 한국적이지만, 동시에 해당 장르의 서구적 전통을 잊지 않는다. 비틀즈(특히 존 레논(John Lennon),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의 영향부터 밥 딜런(Bob Dylan)과 1960년대 서구 포크 음악들의 향기, 그리고 엘튼 존(Elton John)식 피아노 팝/록의 정서 등이 그의 음악적 세계의 기본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가도 이 노래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음반의 첫 트랙이자 타이틀곡 ‘인생’을 처음 듣는 순간, 담담하게 들려오는 그의 보컬로 전해지는 가사에 담긴 인생에 대한 오랜 경험에서 우러난 그의 사색의 메시지에 마치 둔기를 맞은 듯 정신이 멍해짐을 느꼈다. 잔잔하게 보컬을 보좌하다가 종반부에 조덕환이 다 남기지 못한 격정을 채우려는 듯 클라이맥스로 느리게 달리는 김나하비의 건반 연주는 일품이다. 단연 앨범의 타이틀 감으로 손색이 없는 음반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머지 트랙들 역시 이 곡들이 보다 완전한 풀 밴드로 연주되었으면 어땠을까 싶을 만큼 기억에 깊이 남는 아름다운 멜로디의 향연이 이어진다. 그의 느리고 우울한 어쿠스틱 기타 연주가 주도하면서 건반/베이스가 볼륨을 줄이고 그 소리를 보좌하는 ‘Morning Rain’에서 특유의 살짝 날이 선 톤으로 그는 가식에 찬 세상의 뉴스들 속에서 진정한 밝은 미래를 갈망한다. 그러나 애초의 데모 녹음 버전의 미니멀함에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듯한 ‘새 아침’에서의 그의 메시지는 꽤 낙관적이며, 정통 모던 포크의 틀에 충실한 편곡으로 2016년에 공개된 버전보다 더 진한 매력을 담은 ‘Fire in the Rain’을 통해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아직 사랑과 열정을 믿는 순수한 청춘의 마음이었음을 확인시켜준다. 가사 속에서도 살짝 드러나듯 다분히 존 레논의 ‘Across the Universe’에 대한 악상과 편곡의 오마주를 시도한 것 같은 어쿠스틱 발라드 ‘Gloomy Sunday’, 건반과 어쿠스틱 연주의 조화가 빛을 발하며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과 애정의 갈구를 담아낸 ‘Sleep’, 앨범의 대미를 장식하며 정갈한 피아노 연주 위에서 담담하게 전하는 봄의 풍경을 통해 그의 꿈과 희망 속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봄’까지 뮤지션 조덕환이 남긴 마지막 열정의 결과물이 남은 이들의 손길을 통해 아름답게 만개하는 순간들을 체험하게 된다.


분명 우연이었겠지만, 그가 들국화 시절 만든 노래들이 내 20대 초반 대학시절의 삶과도 참 밀접했던 시절이 있었다. 입학 후 학교 운동부 대표팀들의 경기를 위해 우리가 배운 응원가 중 하나가 ‘세계로 가는 기차’였고, 과에서 가입해 활동했던 포크 노래 동아리에서는 항상 동료들의 생일 축하곡(또는 졸업하는 선후배들의 축하곡)으로 ‘축복합니다’를 노래했었으니까. 이제 그의 마지막 레코딩 결과물들을 들으며, 그의 새 노래들이 오랫동안 내 생활 속에서 계속 숨을 쉬며 벗이 되어줄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느껴졌다. 비록 조덕환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이 7곡의 소중한 노래들이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의미로 다가올 수 있기를 희망한다.


2018. 9 / 글 김성환(Music Journalist – Musica Siesta)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