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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주브랜든 Sep 30. 2017

도전하면 얻을 수 있는 것

한국 전용관을 오픈했던 그 기억들

    

무역을 배우겠다는 열정이 ‘킴스클럽’ 아르바이트로 연결되었고, 킴스클럽의 경험이 한국 음반에 대한 관심으로 연계되어 호주 종로서적을 오픈했었다. 서점 주인으로 장난처럼 앙드레김 패션쇼 촬영 갔다가 사기꾼 되지 않기 위해 네오컴 프로덕션을 만들어 영상과 관계를 맺었다. 프로덕션을 하다 보니 한국영화 수입. 배급, 상영이라는 생각지 않은 비즈니스 영역을 개척하게 되었는데 결국 호주에 최초의 한국영화 전문관을 2002년도에 오픈하게 된 기회를 제공받았다. 앞서 말했듯이 비즈니스는 생물이라고 늘 하던 일 혹은 접하게 된 환경 속에서 접목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더 깊이 관찰해보면 과거에 그에 따른 불씨 혹은 씨앗이 뿌려져 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서 내 준 숙제가 있었다. 미래에 대한 꿈을 구체적으로 계획 세워서 학교에서 발표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에 많은 어린이들의 꿈은 대통령이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연예인’ 혹은 ‘스타’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만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대세가 무엇인지 보이는 것 같다. 난 그때 ‘사업가’라고 꿈을 정했다. 늘 근검절약하는 교육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서인지 사업을 하기 위한 사업자금 확보를 위해 먼저 회계사가 되었다가 사업을 해야겠다는 구체성 있는 계획을 잡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려고 하다 보니 이렇게 정리되었다. 대학은 경영학과로 진학하고, 대학 생활 중 강변가요제에 나가서 대상을 타고, 유명한 가수로서 1년간 활동을 하고 돌연 은퇴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회계사 자격증을 확보하고 사업자금을 모아 제대로 된 사업을 시작한다. 스포츠신문에 크게 대서특필된다. “가수 조성우, 회계사 거쳐 사업가로 변신하다”     

한참 한국영화가 인기가 올라가는 시점이 있었다. ‘친구’ ‘무사시’ ‘조폭마누라’ 등 한국영화가 흥행을 할 때 호주에도 이런 영화들이 수입되어 상영되기 시작했다. 나도 그중에 하나인 ‘조폭마누라’를 수입하기 위해 아시는 인맥을 통해 서세원 씨를 만나서 계약을 하고 그 영화를 호주에서 상영시켰다. 그때 당시 한국영화들이 상영되는 대표적 영화관이 있었는데 그 위치가 시드니 중심부에 위치한 차이나타운 근처였다. 그때 당시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한국문화가 유명세를 치르는 시대는 아니었고 가까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친구들이 한국문화에 열광하는 시대였기에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영화관은 아시아 관객들을 끌어드리기에 좋은 위치였다. 한 달간 상영된 ‘조폭마누라’는 나름 관객수를 만들었다. ‘친구’처럼 빅 히트는 아니었지만 많은 외국인들도 왔었고, 한국영화가 세계무대에 진출되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도들이었던 것 같다. 아침, 저녁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감동했다며 영화관 대표가 몇 가지를 제안했다. 70년대 성룡 영화를 수입해서 아파트 몇 채를 구입했을 만큼 중국 영화의 황금기가 있었는데 이제 한국영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 같다며 좋은 조건으로 한국 영화관을 해 볼 것을 제안받았다.     

대학교에서 비즈니스 관련 공부를 했지만 film studies(영화학)를 부전공했던 나는 한때 영화관 오픈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늘 관심을 갖게 되면 생각만으로 멈추지 않고 실천을 했던 기억이 난다. 부동산업체를 찾아가서 영화관 시설을 임대하는 매물이 나와있나 알아보곤 했었다. 만약 이런 꿈을 꾸게 된다면 언젠가 내가 이 꿈을 실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것도 아니고 겨우 4년 정도 지난 시점에서 영화관 대표의 임대 제안은 꿈에 대한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무작정 영화관을 오픈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시장조사를 하고 한국에 영화제작사와 영화진흥공사 등 영화 수입에 관련된 제반사항과 지원사항 등을 알아보았다. 그러던 중 뜻밖에 전화를 받았다. 한국 문화관광부에서 대사관을 통해 한국영화 수입했던 업체들을 조사하고 관련 업체 가운데 발전 가능성 있는 업체에게 지원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엄청나게 좋은 소식이었다. 그때 당시 KOTRA(수출진흥공사)에서 지원하는 호주 차세대 무협 스쿨 부회장직을 함께 맡고 있던 ‘민교’란 업체 여성 대표가 있었다. 이미 ‘쉬리’ 영화를 최초로 수입 상영했고, ‘난타’ ‘조수미의 오페라’ 등 대형 행사를 많이 기획했던 업체였다. 그 대표를 만나 한국영화 전용관의 오픈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역시나 인맥이 좋았던 그 대표는 바로 대사관에 전화를 걸고, 현대, 삼성 쪽에 확인하더니 생각지도 않은 제안을 했다. “저희 민교와 함께 하신다면 대사관을 통해 정부지원금도 받을 수 있고, 현대, 삼성에서도 스폰서 회사로 밀어주신답니다. 저희랑 함께 하시지요”     

너무도 좋은 조건으로 영화관 대표로부터 임대 제안을 받았는데 ‘민교’ 같은 큰 업체가 함께 일을 도모하자며 정부지원금과 대기업의 스폰을 받게 된다면 이것은 정말 너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 같았다. 더욱이 ‘민교’에는 로비스트의 역할을 하는 마당발 여성 대표가 있었고, 부사장으로 계시던 분은 서울대와  조지타운 대학원을 졸업한 너무 똑똑한 분이 포진해 있었다. 사업경력조차 얼마 안 된 내게는 너무도 사업적으로도, 배움의 측면에 있어서도 좋은 기회를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들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드디어 한국영화 전용관 개관식을 개최하게 되었다. 호주대사를 비롯해 정부 관계자와 유명한 많은 분들이 함께 참관한 가운데 테이프 절단식을 하게 되었다. ‘민교’ 대표와 함께 나란히 중앙에 서서 테이프를 가위로 자르는 테이프를 절단하는데 정말 눈물이 났다. 막연하게 대학생 신분으로 영화관 자리를 떨리는 마음으로 진짜로 임대할 것처럼 뻥치면서 부동산업자와 자리를 보고 다녔는데 몇 년도 안 지나서 귀빈들을 초대한 가운데 이제 막 서른이 된 젊은 유학생 출신 사업가가 한국영화 전용관의 대표로서 그 자리에 위치했다는 것은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무엇이든 포기하지 않고 맘먹으면 이뤄낼 수 있다 “는 자신감이 나를 감동으로 이끌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지금도 묻는다. 한국을 놔두고 호주에서 그렇게 오랜 세월 살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냐고. 난 그때마다 그 ‘테이프 절단식’을 떠올린다. 호주에선 제가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여러 시도를 해 보기에는 한국이라는 백그라운드를 지닌 내게 호주땅은 참 쉽기도 하고 비즈니스가 재미있는 나라였다. 왜냐하면 국민 GNP는 2016년 기준 호주가 5만 4천 불이고, 한국은 2만 9천 불에 불과하지만 실제적인 기술이나 발전 속도를 보면 한국이 호주보다 5년에서 10년 정도 앞서 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먼저 한국을 통해 미래를 본 다음 호주에 그 미래를 접목시키면 늘 앞서가는 사람이 되는 구조 같았다. 마치 과거 80년대에 일본에서 유행하던 것들이 뒤늦게 한국에 들어오는 구조처럼 말이다. 한국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헬조선’이라 칭하며 한국의 삶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한국을 벗어나서 한국을 바라보면 한국만큼 멋지고 역동적이고 발전된 나라도 그렇게 많지 않다. 충분한 자부심을 가지고 한국 안에서 멈추지 않고 세계로 뻗어나간다면 한국이라는 백그라운드가 얼마나 든든한 최고의 백(?)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한국 교육에서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SKY 대학을 입학하지도 못하고 스파르타 학원에서 재수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대학을 진학하지 못해 열등감을 갖고 호주로 와서 겨우 대학을 가서 간신히 졸업한 내가 호주에서 나름 젊은 나이에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절대적인 고국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민교’ 부사장에 대해서 부러움을 갖고 그분을 봤었다. 어쩜 영어도 저렇게 잘 하고 일처리나 뭐든 하는 모든 일들이 완벽한 사람 같았다. 어느 날 ‘민교’ 사무실 입구에서 들어가려다 말고 잠깐 걸음을 멈췄다. 안에서 사람의 곡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일 대낮에 울부짖는 소리가 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었다. 알고 보니 그 완벽한 부사장이 심각한 우울증 환자였고 한 번씩 발작을 일으켰을 때 울부짖고 사무실을 공포로 몰아넣는 비운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은 분명히 한쪽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는 것 같다. 우리가 대재벌 집 아들, 딸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영재 발굴단에 나오는 똑똑한 천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부러운 시선을 가질 때가 있다. 하지만 길지 않은 인생길에서 나름 다양한 삶을 살아온 내게 있어서 결론은 그다지 부러워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비록 평범한 우리일지라도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면 누가 주어지는 기회를 잡는 게 아니라, 타고난 재능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수성가’한 주인공으로서 멋지게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의 태도를 바꿔 비판하는 시각을 뛰어넘어 긍정적 사고로 길이 없으면 길을 개척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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