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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미션 Feb 04. 2022

5. 소녀시대

[수요일 10시, 아하하하 소희 씨]

“오늘은 민재가 늦게 오니?”

“축구교실 갔다가 화요일은 5시 넘어서 오지.”

“근데 너 좀 서운하지 않니? 애들이 부모 생각보다 빨리 크고 훨씬 잘 해.”

“오늘은 갈아입을 축구복까지 갖고 어린이집 갔는데, 오후 간식 먹고 옷 갈아입으라고 하니까 “엄마, 나 긴장돼, 혼자 옷 갈아입어야 하니까 긴장 돼.” 그러더라고. 긴장도 되고, 또 설레기도 하고 그러는 것 같아, 혼자 옷 갈아입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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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저귀를 떼면서 대소변 가리는 걸 가르친 게 엊그제인데, 아이는 여섯 살이 되자 혼자 축구교실 버스도 타고 옷도 갈아입는다. 나중에 생각하면 별 거 아닌 일 같은 것들이 한 생명이 자라는 과정에서 보면 하나하나가 다 감격이고 놀랍다. 내겐 특히 ‘발’이 그러한데, 태어났을 때 손가락 하나 길이만 하던 발은 게으름도 없이 자라서 계절마다 신발이 작아진다.  ‘아, 벌써 이만큼 컸나, 금방 내 발 보다 커지겠네, 군함 같은 신발을 신고 다니겠네’ 하는 생각이 성큼 커진 신발을 보며 든다. 무럭무럭 자라는 건 아이만이 가진 축복인데, 여기에 엄마 말마따나 부모의 생각보다 훨씬 무언가를 잘 하고 있다. 


엄마 소희 씨도 무럭무럭 자라는 특권의 시기를 거르지 않고 지나왔다. 언제나 ‘무리 중 큰 키’였다는데, 그에 비해 나는 언제나 ‘무리 중 작은 키’였다. 스무 살 성인이 될 때까지 나는 우리집 최단신이었다. 중학생 때 1리터짜리 곽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라면을 한 끼에 두 세 개씩 끓여먹으며 퉁퉁이로 살았던 오빠는 고등학생이 되자 대나무처럼 키만 쭈욱 크며 180cm 라인을 가뿐하게 넘어섰다. 장신 집안은 아니지만 하체가 길었던 가계의 장남인 아빠도 170cm를 갓 넘긴 키였지만 훤칠해 보였고, 엄마는 어디 가서든 ‘그 시대 여자’라는 전제조건 없이도 작은 키는 아니었다. 미취학 아동 시절엔 ‘쥐털박이’, '땅꼬마‘로 불리곤 했고 초등학교 1학년, 표를 끊고 지하철을 타는 기쁨의 시절이 내게도 분명히 왔는데도 역무원은 꼭 나를 미취학 아동으로 분류했다. 굳이, 매표소에, 가서, "저는 초등학생입니다"라고 하지 않는 한 개찰구 아래로 허릴 굽혀 들어가고 나가곤 했는데 2학년이 되어서는 어렵지 않게 어린이표를 손에 쥐었던 것 같다. 여기에 외할머니로부터 엄마를 거쳐 내려오는 1대 1 상/하체 황금 비율을 이어 받았으니 나는 더 작고 땅딸한 아이가 되어버렸다. 소희 씨는 유전보다는 “네가 그렇게 학교 급식 우유를 안 먹고 책가방에 숨겨 왔으니” 그렇다며 이 사달의 책임을 내 앞으로 돌렸다. 



나는 워낙 어려서부터 컸지. 내가 고등학생 때 키가 163인가, 4인가 그랬는데. 아이고, 지금은 156, 7이더라. 7살에 학교에 갔는데 그래도 반에서 키가 제일 커. 


학생 때 뭐 있나, 명랑 쾌할, 아하하하하.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고 그랬지. 애들하고 빨래하고 집에 가는 길에 남산공원에서 실컷 놀고. 놀다 보면 고무신에 피가 가득해. 이게 뭔가 하고 보면 장단지에 거머리가 붙어서 그거 떼 내고. 어렸을 때 학교에서 무슨 서류 필요하다고 그러면 내가 혼자 면사무소 가서 다 떼서 내고. ‘박용인 선생 딸 박소희라고’ 하하하하. 그러면 다들 “네가 소희구나” 하고 서류 떼 줘. 오빠 것까지 떼다 줬어. 그러면 어린애가 이렇게 야무지다고 막 칭찬들 해 줬지. 


내가 공부를 못하는 애는 아니었는데, 별로 노력을 안 했던 것 같아. 적당히 해도 어느 정도 하니까. 그리고 예전엔 뭐 지금처럼 공부 시켰니. 동생들은 줄줄이라 엄마는 걔들 챙기기도 바쁘지. 선생 월급이 적으니까 약국하시는 작은 아버지가 닭이라도 키워보세요, 하고 닭을 100마리인지, 200마리인지 굉장히 많이 사주셨어. 한동안 엄마 혼자 그 닭을 키우셨어. 닭이 얼마나 먹는지 아니? 엄청 먹어. 하루에 몇 번이나 먹이를 주는지 몰라. 닭 사료 갖다 몇 달 먹여서 알 낳으면 그 알 팔고, 여름이면 닭 알 잘 낳으라고 풀 뜯어다 먹이고. 우리 여자 형제들이 다 같이 아카시아 잎 훑으러 다녔어. 훑어다 사료에 섞어서 주면 닭이 알을 잘 낳아. 지금 생각해보면 알 성분이 그 때가 더 좋았겠지. 그렇게 엄마는 하루 종일 바쁘지, 그땐 아버지가 객지로 발령 나셔서 자주 왔다갔다 하지도 못하셨으니 큰 딸이 얼마나 할 일이 많겠니. 공부할 시간이 없지. 중학생이 밥 먹은 설거지 다 하고. 그땐 간장 종지에다 고추장 넣어서 도시락 싸오는 애들도 있었어. 아니면 김치 한 가지. 그런데도 우리 엄마는 멸치 볶고, 오징어채 볶고, 장아찌나 뭐나 해서 두 세 가지 반찬을 꼭 해서 넣어줬어. 엄마가 도시락 쪽 펼쳐놓으면 내가 반찬 넣고 그랬지.


아버지가 어항 큰 거 사다 놓으시면 형수가 거기에 비눗물 풀고 놀고, 그럼 내가 다 치우고, 그랬던 생각이 나. 그리고 옛날엔 화장실이 재래식이었잖아. 오빠는 고등학교를 서울로 갔으니까 아버지가 꼭 나랑 똥을 푸자고 해. 그러면 똥통에 똥을 퍼 담아서 긴 작대기에 꽂아서 가운데 두고 아버지는 앞에, 나는 뒤에 들지. 아버지가 "소희야, 내일 똥 푸자" 그러면 난 신경질이 나서 대답도 안 하거든. 그러면 아버지가 "아이고, 쟤 똥 푸기 싫어서 대답도 안 하네" 그러고 마셔. 그래도 다음날 아침이면 나도 일어나서 푸지. 너 똥이 얼마나 무거운 지 아니? 그걸 아버지 혼자 들면 얼마나 힘들겠어. 푼 똥은 집 밖에 오줌독에 부어두고 썩히는 거야. 그래서 거름으로 썼지. 식구들이 많으니까 똥도 금방 채워져, 아하하하하하.


8월 15일에는 김장 갈았지. 그게 무슨 말이냐면, 김장 거리를 심는다는 거야, 무, 배추. 그땐 학교에서 광복절 행사를 했는데, 일하기 싫어서 꼭 그 행사에 갔거든. 아버지도 선생님이니까 학교에 가시고. 결국 학교 갔다와서 둘이 또 심는거야. 한 번도 안 빠지고 했어. 


고등학교 졸업하고 간호대에 가려고 했었어. 아버지는 교대 가길 바라셨는데 예비고사 떨어지고, 간호대는 예비고사 없이 원서 넣어서 가는 거였거든. 아마 원서 썼으면 됐을 거야. 원서 사러 가려고 하는데 엄마가 서부 약국(엄마의 작은아버지 댁)에 갔다 오시더니 작은 아버지가 펄펄 뛰면서 반대하신다는 거야. 작은아버지가 그때 당시 돈을 엄청 버셨어. 원양어선을 하셨는데 배가 계속 들어오고, 또 약국이 약 잘 짓는다고 소문이 나서 시골 사람들 다 거기로 몰렸지. 그런데 이혼했던 작은 엄마가 간호사였나봐. 그리고 또 작은아버지랑 친한 양복점 남자가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죽어서 부검을 했다나봐. 그걸 보러 병원에 가셨는데, 부검 뒤처리를 간호사 혼자 다 하더라는 거야. 왜 소희가 그런 일을 하게 하느냐고 펄펄 뛰시더라고. 여러모로 간호사에 대한 인식이 안 좋으셨던 것 같아. 그러니까 참 옛날 사람 생각이지. 안 그러냐? 난 어디라도 가고 싶었거든. 


엄마가 그 소릴 듣고 오더니 막 반대를 하고, 안 좋은 이야기만 하니까 아버지도 뜨악 하신거지. 너한테 어떻게 그런 일을 시키냐고. 그래서 간호대학을 못 갔다니까. 같이 원서 쓰자고 한 친구들 몇 명은 그 학교 들어갔어. 한 명은 순천향대병원 수술실에 있단 소리도 듣고, 또 한 명은 파독갔다는 얘기도 듣고. 나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니. 왜 하필 내가 원서 쓸 때 그 양복점 남자가 죽었을까. 그걸 왜 작은아버지가 보셨을까. 다 내 팔자소관이지."



그리하여 고교 졸업생 엄마는 ‘박양’이 되어 경찰서에 들어갔다. 당시 홍성경찰서의 서장이 집안과 아주 친한 관계였는데, 워낙 유명한 갑부집 외손녀에게 마침 비어있는 수사과 여직원 자리를 안 내어줄 까닭은, 그 시절엔 없었을 것이다. 



그 경찰서장하고 우리집안이 친척같이 지냈지. 그런데 홍성 수사과에 촉탁직원, 월급은 도경경찰국에서 주는 범죄 통계 요원 자리인데, 당시에는 서장이 얼마든지 추천해서 그 자리에 사람을 넣을 수도 있었거든. 옛날엔 다 그랬잖니. 그 자리가 비었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그 서장을 찾아갔다. 내가 누구누구인데 그 자리에 들어가고 싶다고.


그러니까 그 사람이 “너의 집에서? 아버지, 어머니 허락은 받았니?” 그렇게 묻더라고. 그때만 해도 양갓집 규수, 그런 인식이 있어서 일을 가렸거든. 특히 우리 아버지는 경찰을 아주 싫어했어. 일제시대 거치면서 순사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크셨으니까. 아버지가 나 경찰서 들어가면 경찰한테 시집간다고 하시면서 못 들어가게 하셨어. 그런데 내가 아무래 생각해도 홍성에서 어디 들어갈 데가 없는 거야. 친구들은 군청 소사, 읍사무소 소사, 그런 곳에 들어가는데 통계요원은 뭔가 좀 다를 것 같고. 그래서 하겠다고 하니까 서장이 넣어주더라. 그래서 출근했지. 처음엔 아버지 몰래.


* 소사 : 관청이나 회사, 학교, 가게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고용한 사람(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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